때 이른 태풍이 연이어 올라온다고 한다. 지금은 오랜 가뭄 끝이라 비를 몰고 오는 태풍이 반갑기도 한데 본래 나처럼 과수원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제일 두려운 게 또한 태풍이다. 태풍뿐 아니라 갑자기 닥치는 모든 자연 재해는 두려운 존재다. 일상적이지 않은 것, 낯설고 거대한 힘 앞에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여름날, 멱을 감고 돌아오던 들판에서 엄청난 뇌우를 만난 적이 있다. 하늘을 가르며 쉴 새 없이 내리 꽂히는 번개에 포위되어 나는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당장이라도 머리에 떨어질 것 같던 번갯불의 이미지는 지금껏 내게 남아있는 두려움의 원형이다. 어린 나는 희미하게나마 이 세상에는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어떤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을 터이다.
소설이나 시에도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이 있다. 아마 여타의 예술 장르도 비슷할 거 같은데 평소에 친숙하거나 습관적으로 대하던 사물이나 관념을 전혀 다른 각도로 표현하는 기법이다. 그럼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하고 인지부조화를 통해 충격적으로 다가가게 만들기도 한다. 공포소설의 구조를 보면 대개 이 기법에 충실하다. 사람에게 공포를 유발하는 것은 예기치 못한 낯선 상황이거나 익숙했던 것이 반대로 낯설게 되는 순간들이다. 현실에서 그런 일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면 그 누구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소설 같은 일이나 영화 같은 상황은 아주 드물고 그날이 그날인 평온을 유지하는 게 누구에게나 주어진 평등한 일상이다.
그런데 가끔 이런 낯섦과 두려움을 이용하는 자들이 있다. 천둥의 신 토르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골방에 앉아 공포소설을 끼적이는 갑남을녀는 더욱 아니다. 그러니까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자라는 말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애용하는 것이 백성의 공포인 것이야 예로부터 유구하지만 특별히 정치학 용어로 ‘미친 사람 이론(Mad man Theory)’이라는 게 있다. 쉽게 말하면 미친 척 하기인데 상대에게 나는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 국가 사이의 외교무대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수법이다. 상대가 미친 사람이라서 당장이라도 핵무기를 날릴 수 있다고 믿게 된다면 당연히 두려움을 갖게 될 거라는 이론이다. 미국의 닉슨이 자신을 비이성적인 매드맨으로 포장하려 했던 것은 유명한 일이다. 전쟁광이었던 나폴레옹이나 히틀러 등도 그 이론의 신봉자였을 것이다. 물론 진짜 미친 인간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작금의 믿기지 않는 현실을 보며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된 생각이다.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쏟아낸 말들을 들으며 나는 바로 그 낯섦과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전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과 불구의 언어들, 감정 조절과 통제가 안 되는 최고 지도자의 모습은 가히 충격이자 공포였다. 심지어 어떤 일이 있어도 현 대통령을 지지하고 말겠다는 결심이 굳건한 아버지조차 웬만큼 질리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어떤 비이성적인 일도 할 수 있으며 상식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고 백성의 머리 위에 떨어진 쇠망치였다. 한편으로는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민주주의의 퇴보라는 말도 이제는 식상할 정도가 되었고 힘겨운 살림살이에 더해 비이성이 횡행하는 정치 밑에서 살아가야 하는 백성들의 고단함이 애달프다.
대통령이 구사하는 극단적인 언어와 비상식은 우리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길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처럼 비정상이 지속되다가 무엇이 정상인지 잊어버리지나 않을까 두렵다. 게다가 거기에 맞장구 치는 또 다른 오염된 말들이 이 사회를 이엉차, 하고 한 걸음 더 나락으로 밀어 넣을 테니 말이다. 언젠가 오늘을 뒤돌아보며 낯설게 느낄 그 날이 오려나.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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