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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º] 그래도 개천에서 용 난다

입력
2015.07.0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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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출신 법관 임명식에서 신임 법관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이날 로스쿨 출신 가운데 3년 이상의 법조경력을 가진 경력법관 37명이 처음으로 임용됐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출신 법관 임명식에서 신임 법관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이날 로스쿨 출신 가운데 3년 이상의 법조경력을 가진 경력법관 37명이 처음으로 임용됐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내 평생 가장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단어는 ‘법조인(法曹人)’이다. 그 말을 처음 들었던 건 고등학교 1학년이던 초여름의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의 장래 희망을 조사했는데, 친구 하나가 적어낸 꿈이 법조인이었다. 공부를 썩 잘하는 친구는 아니었다. 당시 나는 서초구의 그 학교, 그 학급에서 서초구에 거주하지 않는 유일한 학생이었는데, 공부를 어지간히 하는 축이었음에도, 법조인이란 말은 처음 들어봤다. 법조인의 딸들이 많이 다니던 학교를 다녔건만, 판ㆍ검사, 변호사만 알았지 법조인은 몰랐다.

친구의 낯선 꿈 앞에 적잖이 당황하는 동시에 그게 법을 만드는(法造) 사람들을 뜻하는가 보다 재빨리 짐작하며 무식이 들통나지 않게 순발력을 발휘했다. TV 드라마가 문화 체험의 핵심이었던 당시의 나는 오로지 김수현 같은 드라마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듣자 하니 우리 반의 많은 아이들이 법조인을 장래희망으로 적어냈다고 했다. 사춘기여서 그랬겠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슬픈 감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거나, 그게 꿈인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이팔청춘이 되도록 그런 말조차 들어본 적 없었다니. 세상은 내가 나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두려운 곳으로만 느껴졌다.

20년이 더 되도록 생생하기만 한 그날의 풍경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떠오르는 일이 더 잦아졌다. 그날의 상처받은 어린 소녀와 워킹맘으로서는 위태로울 정도로 ‘새끼 사랑’이 지독한 어미가 동시에 내 안에 살고 있어, 가끔씩 나는 자식을 질투하는 변태적 어미가 된다. 여덟 살짜리의 입에서 복잡한 개념어와 추상어들이 적확하게 문장으로 구현될 때, 어미는 환호하고 소녀는 슬퍼한다. 우주과학에 해박해진 아이가 민트그린을 해왕성 색깔이라고 표현할 때, 식사 전에 사탕을 먹겠다고 떼쓰는 여동생에게 “넌 만족지연 훈련을 더 해야 돼” 소리칠 때, “저게 누구 아들이야” 깔깔거리면서도 마음 한 켠이 서늘하게 아려온다. “아이가 책을 정말 많이 읽는 것 같다”고 담임교사는 오해하지만, 실은 중산층 지식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자연스레 상속받은 문화자본일 뿐이다. 엄마의 자부와 소녀의 질투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 ‘이건 뭔가 공정치 않잖아.’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다’라는 말마저 떠돈 지 오래다. 수많은 언론 보도가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사회를 묘파하는 데 주력하고 있고, 신 계급사회의 증거만 도처에 즐비하다. 판사 집안에 판사 나고, 교수 집안에 교수 나는 ‘신 음서제’를 규탄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사회의 진실이기 때문이지만, 그 진실이 총체적인 것은 아니다. 드물지만 개천에서는 여전히 용이 나고 있다. 다만 그런 반례들이 기사로서 그다지 참신하고 매력적이지 않을 뿐이다.

우리가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수도 없이 지껄인 탓에 세상이 두려운 아이들이 꿈을 작게 가질까 봐 두렵다. ‘개천의 용’이라는 담론 자체에 반대한다는 지당하신 말씀도 어쩐지 불편하다. 개천에서 났든, 대하에서 났든, 용이라는 알레고리가 의미하는 승자독식의 구조는 타파하는 게 옳다. 용이 너무 많이 나와 용과 용 아닌 것의 차이가 흐려지는 것이 우리 사회의 지향이어야 한다. 다만 동네 빵집 주인의 삶을 성공한 용의 삶으로 만드는 것은 부잣집 아이들이 해주고, 판ㆍ검사 해봤자 별것도 없다는 진리는 가난한 집 아이들의 입에서 나왔으면 좋겠다.

어느 로스쿨 교수에게 들은 얘기다. 들어가기만 하면 사법고시에 합격한다는 하숙집의 비밀이, 알고 보니, ‘아니, 저 자식도 붙었어?’였다는 거다. 그가 ‘스피릿’이라는 말로 표현한 ‘그까이 거, 니가 하면 나도 한다’ 정신이 ‘과연 할 수 있을까, 없을까’의 회의를 소거해버린 탓에 보다 빠르게 합격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멀리뛰기를 할 때 우리는 2미터쯤은 내다봐야 1.5미터라도 뛴다. 그래서 나는 재판장에 선 갈릴레오처럼 자못 비장한 심장으로 세태를 거스르며 중얼거린다. ‘그래도 개천에서 용 난다.’

박선영 문화부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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