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메이지(明治) 산업혁명 유산’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국제회의에서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을 처음 인정했다. 일본은 독일 본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수많은 한국인이 본인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 노역했다(forced to work)”고 시인하고, 나아가 “정보센터 설치 등 피해자를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역사의 밝고 어두운 면 빛과 그늘을 있는 그대로 기억해야 한다”는 우리 측 주장이 반영된 것이다. 대일 외교전에서 모처럼 거둔 성과로 평가할 만 하다.
하지만 일본은 세계유산 등재 결정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강제노동 표현을 부인하고 나섰다. ‘forced to work’ 표현을 두고, 기시다 후미오 외무장관은 “강제 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일본 정부가 공개한 가(假)번역본도 이 부분을 강제의 의미가 빠진 단순 수동형인 ‘일하게 됐다(?かされた)’로 표기했다. 사전 협상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강제 노동의 의미를 명확하게 담은 ‘forced labour’라는 표현 대신, 일본이 ‘forced to work’를 고집한 것은 언어적 수사를 빙자한 꼼수에 불과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기시다 장관의 발언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상을 둘러싼 기존 입장을 유지하면서, 현재 국내에서 진행중인 일본 전범기업을 대상으로 한 강제 징용 관련 소송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외교 채널을 통한 대화에서 한국이 이번 발언을 한일 청구권 문맥에서 이용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정치 쟁점화를 우려하는 이 같은 발언은 언어도단에 가깝다. 세계유산의 등재 조건이 “한 나라에 머물지 않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있음에 비추어, 메이지 산업시설에서 자행된 강제 노동의 역사도 존중 받아야 마땅하다.
일본은 눈부신 경제 성장의 기틀이 된 근대 산업시설을 세계 유산에 등재, 자긍심을 되찾겠다는 취지가 한국측의 ‘강제 노동’ 공세에 밀려 퇴색했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과거사에 대한 진정성 있는 반성만이 국제 사회에 떳떳하게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행 강제 수단이 없다는 이유로 국제 사회와의 약속을 헌신짝 내버리듯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정부도 “일본의 양심과 재량에 맡긴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국제사회와의 공조 등 일본의 약속 이행을 실효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후속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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