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바닥에 마른 체구의 남성이 쓰러져 있다. 옆에는 자전거가 널브러져 있고, 자전거 위로 탱크 바퀴자국이 선명하다. 손에 쥐고 있는 피켓 위에 쓰인 말은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미국 만평계의 아버지라 불리는 올리판트가 그린 이 만평은 1989년 6월 5일 중국 정부가 시위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한 천안문 사태를 묘사한 것이다.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를 언급하는 건 지금까지도 금기지만, 올리판트는 그림 아래 “톈안먼을 잊지 말라(Remember Tiananmen square)”고 선명하게 써놨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펜을 휘두르는 만평가 86인의 작품 230점을 모은 책 ‘세상을 향한 눈’(문학동네)이 출간됐다. 1989년부터 2012년까지 지구 구석구석에서 일어났던 폭력과 부조리, 비극과 역설이 한 칸짜리 그림 안에 압축돼 있다.
1990년 3월 독일 오일렌슈피겔에 실린 라이너 에흐르트의 만평은 불완전한 독일의 통일을, 짜깁기된 인간의 몸으로 표현했다. 바싹 마른 한쪽 몸(동독) 때문에 반대쪽의 비대한 몸(서독)까지 휘청대는 뒷모습을 통해 통일의 축포 뒤에 드린 불안과 회의의 그림자를 담아냈다.
2008년 9월 16일 네덜란드 햇 파롤에 게재된 요엡 베르트람스의 만평은 세계 경제위기를 촉발시킨 2008년 리먼 브러더스 파산을 유머러스하게 비꼬았다. 공중곡예를 하다가 막대를 놓치고 추락하는 두 남자는 리먼 형제로, 리먼 브러더스 투자은행은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막대한 부채 규모를 은폐하다가 9월 15일 파산, 세계 금융 기반을 뒤흔들어놨다.
2010년 12월 13일 독일 쥐트도이체 차이퉁에 실린 호르히의 만평은 위키리크스 사태를 그렸다. 우아한 파티장 한가운데 난립한 하룻강아지가 귀부인의 엉덩이 부분 옷자락을 찢어 신나게 내달리는 그림으로, 2010년 한 미군이 외교 기밀 자료를 대거 위키리크스에 넘긴 정황을 빗댔다. 이로 인해 미국의 민간인 사살을 비롯한 외교 비사가 만천하에 공개됐고, 민주주의 수호자를 외치던 미 정부는 체면을 구겼다.
이 책을 편집한 프랑스의 세계정세분석가 장크리스토프 빅토르는 “만평은 만화라는 제9의 예술과 언론이라는 제4의 권력이 교차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폭로의 예술, 쓴소리의 예술이란 점에서 만평은 가장 민주적인 예술이라 할 수도 있겠다. “만평은 많은 경우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기분을 상하게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만평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다.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하나의 문제 나아가 매우 구체적인 위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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