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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포퓰리스트 치프라스를 위한 변명

입력
2015.07.0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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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현지시간) 아테네에서 찬성표를 지지하는 집회에서 한 시위자가 그리스 국기와 '예(NAI)'라고 적힌 또 다른 깃발을 들고 있다. 뉴시스
3일(현지시간) 아테네에서 찬성표를 지지하는 집회에서 한 시위자가 그리스 국기와 '예(NAI)'라고 적힌 또 다른 깃발을 들고 있다. 뉴시스

“다음주에도 그리스 국민들에게 산소는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상환일을 목전에 둔 지난달 27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프랑수와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의 막판 담판에서 협상이 결렬된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발언을 전한 외신을 읽으며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올랐다. 절망의 순간에도 농담으로 두려움을 떨쳐버리며 원하는 길을 가던 조르바. 그가 만약 그 자리에 참석한 그리스 총리였더라도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다.

일부 언론은 그리스 정부가 국제채권단이 구제금융 연장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내건 개혁안을 거부한 것을 국민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무책임한 결정이라며, 치프라스의 포퓰리즘을 비판했다.

올해 초 집권한 치프라스가 도대체 반년도 안된 동안 얼마나 큰 잘못을 한 걸까. 책임을 따지자면 적어도 6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책 없는 포퓰리즘으로 12년 장기 집권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전 총리에 이어 2009년 총리에 오른 아들 게오르기우스는 그 해 10월 숨겨진 재정적자가 공식 수치보다 2배 이상 크다고 공개하면서 그리스의 만성적 파산위기가 시작된다. 다음해 5월 유럽연합(EU)과 IMF가 임금삭감과 세금인상 등 긴축정책을 실시하는 것을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오늘날 비극의 싹을 틔웠다.

그 후 5년간 그리스는 긴축정책을 성실하게 실천해 왔다. 그 결과 지난해 기초재정수지(국채지급 이자 제외)가 흑자로 돌아섰다. 하지만 그리스는 시들어가고 있다. 5년간 국내총생산(GDP)이 25% 축소되고 실업률은 25%에 달하며 청년실업률은 50%를 넘는다. 경제가 활력을 찾아야 세수가 늘고 이를 통해 외채를 갚을 수 있는데, 지나친 긴축이 경제발전의 동력을 꺼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지원된 구제금융 2,520억유로(약 313조원)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이중 그리스 경제를 위해 쓰인 돈은 200억유로뿐이다. 나머지는 부채 원금과 이자를 갚거나 그리스 은행 지원 등에 들어갔다. 결국 국제채권단의 구제금융 대부분은 떼일 뻔하던 자신들의 돈을 회수하는 데 쓰였고, 그 빚은 고스란히 그리스 국민에게 넘겨진 셈이다.

이런 사정을 아는 국제채권단은 구제금융 연장조건으로 2018년까지 기초재정수지 흑자폭을 GDP의 3.5%로 맞춰 빚을 갚으라는 가혹한 조건을 고집하고 있다. ‘21세기 자본’을 쓴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는 “현재 그리스의 외채는 향후 30년간 GDP의 4%를 채무상환에 쏟아 부어야 하는 재앙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IMF마저 “빚 탕감 없이 그리스를 정상화할 수 없다”고 인정할 정도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런 가혹한 개혁안을 앞장 서 주장하는 나라가 독일이라는 점이다. 1933년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전승국의 무리한 전쟁 배상금을 갚느라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독일이 자신의 아픈 과거와 나치즘의 대두라는 역사적 교훈을 잊어버린 걸까.

그보다는 메르켈 총리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그리스 사태 해결을 외면하고 있다는 게 합리적 설명일 듯하다. ‘부채 탕감’은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 추가지원에 반대하는 독일 국민들의 정서와 야당의 거센 공격을 피하기 힘들다. 제프리 삭스 콜롬비아대 교수는 메르켈의 이런 정치적 계산을 무모한 모험이라 경고한다. 2008년 9월 헨리 폴슨 당시 미 재무장관이 ‘리먼브라더스 하나 부도 난다고 해서 별 타격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 글을 읽는 6일 아침이면 그리스의 운명을 결정짓는 국민투표 결과가 나와있을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감당할 수 없는 구제금융 연장조건을 박차고 나온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와 개인적 정치 이익을 위해 그리스와 유럽 경제를 건 도박에 나선 메르켈 독일 총리 중 누가 더 위험한 포퓰리스트일까.

정영오 국제부장 young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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