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송산리 7호고분으로 발굴된 무령왕릉이 세상에 드러난 과정은 드라마틱했다. 이미 발굴이 마무리된 6호 고분 내부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배수로를 정비하던 중 새로운 고분의 존재가 알려졌다. 입구가 막혀있어 도굴꾼의 손이 미치지 못했다. 내부 훼손이 거의 되지 않은 채 부장물이 고스란히 발견돼 고고학자들을 흥분케 했다. 람세스 6세의 무덤에 입구가 가려져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된 투탕카멘 무덤에 비견할 만 했다. 그게 1971년 7월5일이었으니, 딱 41년 전 일이다.
▦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삼국시대 신라, 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하다고 여겨진 백제의 문화적 위상은 일변했다. 연꽃 모양의 양각 벽돌이 바깥쪽으로 노출되는 사평일수(四平一竪)방식을 채택했고, 내부 조명용 등잔을 올려놓는 등감(燈龕)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장식을 새겨 예술미를 더했다. 이 곳에서 발굴된 금제관식, 팔찌 등 유물 4,600여 점 중 17건이 국보로 지정됐다.
▦ 무령왕은 역대 백제왕들 중 유독 일본과 인연이 깊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은 백제 개로왕은 구원 요청차 동생 곤지를 일본에 보냈다. 곤지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개로왕의 후궁과 함께 일본행 배에 몸을 실었는데, 지금의 규슈현 가쿠라시마(지금의 가카라시마)에서 아이를 낳았다. 이가 곧 무령왕이라는 것이다. 일본사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섬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시마군(島君)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백제인들은 가쿠라시마를 왕이 탄생했다고 해서 국주도(國主島)라고 불렀다고 한다. 무령왕과 왕비의 관(棺)도 일본의 지배층의 상징인 규슈산 금송(金松)을 가져다 썼다고 전해진다.
▦ 무령왕릉 등 백제 송산리 고분, 관북리 유적, 부소산성, 익산 미륵사지 등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1995년 석굴암, 불국사 등이 처음 등재된 이후 12번째 쾌거다. 경주역사유적지구(2000년), 고구려 고분군(2004년) 등 신라, 고구려에 비해 뒤늦은 감이 있지만, 삼국시대의 유적이 모두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만큼 의미도 남다르다. 일본 근대 산업혁명 유적에 조선인 강제 징용소가 포함되면서 빚어진 논란으로 밀렸던 관심을 이제라도 쏟아야겠다.
한창만 논설위원 cm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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