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민주화 이후 역대 정권은 으레 여당과의 불협화음을 겪었다. 권위주의 시절과 달리 대통령은 더 이상 절대권력자가 아니었다. 더욱이 ‘5년 단임제’의 특성상,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을 넘으면 일찌감치 권력누수가 찾아왔다. 이런 대통령에 기대어 대선과 총선을 치러서는 승산이 없다는 생각이 여당 내에서 힘을 얻게 되는 순간 당청(黨靑) 갈등이 분화(噴火)했다. 여당은 물론이고 국민의 눈길마저 ‘미래권력’에 쏠린 시점이어서 패배는 늘 청와대 몫이었다.
▦ 1992년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와의 갈등으로 탈당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처음이었다. 이어 1997년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와의 갈등 끝에 탈당한 김영삼 전 대통령, 2002년 이른바‘홍삼(弘三) 트리오’ 비리와 관련해 당시 새천년민주당을 떠난 김대중 전 대통령, 오랜 여당 내 계파 갈등에 시달리다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탈당한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끝까지 여당에 남았지만, 2010년 ‘세종시 수정안’이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반대로 좌절된 이후 정치 주도권을 잃었다.
▦ 현재의 당ㆍ청 갈등은 많이 다르다. 우선 대통령과 당 대표를 축으로 청와대와 여당이 집단의 정치이해를 다투었던 전통적 구도와는 딴판이다. 저주에 가까운 박 대통령의 비난을 신호탄으로 한 친박(親朴)계의 노골적 퇴진 공세에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버티고 있는 구도다. 말이 ‘당ㆍ청 갈등’이지, 실제로는 대통령과 여당 원내대표의 신경전과 다름없다. 과거 두 사람의 관계나 현재의 법ㆍ정치적 위상을 생각할 때 도무지 격(格)이 안 맞는 다툼이다. 대통령으로서는 이겨 봐야 체면 유지에 급급할 싸움이다.
▦ 감정을 다 드러낸 박 대통령과 달리 유 원내대표는 말을 아낀 채 고개 숙여 사죄하는 모습부터 보였다. 거듭된 친박의 퇴진 공세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척했다. 친박은 초조하고 화가 치밀 만했다. 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펼쳐진 ‘막장 드라마’는 그 필연적 귀결이다. 그제서야 친박은 물밑 공세 위주로 전략을 바꾸었다. 뒤늦게 싸움의 지혜를 깨달은 셈이니, 화제의 이체급 경기가 더욱 볼만해졌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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