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가 처한 환경·필요 이해없인 쓸모있는 적정기술 제품 불가능
주위 사람 관찰과 이해에서 출발
다양한 '인간 중심 문제 해결' 도움 주고 받는 인재 키워
국제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과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가 지난달에 발표한 ‘아동의 행복감 국제 비교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어린이의 주관적 행복감이 조사 대상인 12개국 어린이 가운데 가장 낮았다(본보 5월 19일자 12면). 한국을 비롯해 루마니아 콜롬비아 노르웨이 이스라엘 네팔 알제리 터키 스페인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독일의 12개국 어린이 4만2,567명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서 한국 어린이의 만족도는 연령별로 10점 만점에 8.2점(8세), 8.7점(10세), 7.4점(12세)로 전체 최하위였다. 12개국의 연령별 만족도는 각각 8.9점, 8.7점, 7.4점이었다. 한국 어린이들의 행복감은 경제 수준이 낮은 네팔(8.4점, 8.6점, 8.5점), 에티오피아(8.2점, 8.6점, 8.3점)보다도 낮았다. 가족, 물질, 대인관계, 지역사회, 학교, 시간 사용, 자신에 대한 만족 등 모든 영역에서 전체 평균을 밑돌았다. 특히 자신의 외모, 신체, 학업성적에 대한 만족감은 각각 7.2점, 7.4점, 7.1점으로 바닥이었다.
예상컨대 대상을 중고등학생으로 확대할 경우 한국 청소년의 주관적 행복감은 더 낮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가지는 학업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러면 과연 이에 대한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타인에 공감하는 이가 행복하다
건강 심리학자인 켈리 맥고니걸은 2014년 3월 ‘스트레스를 친구로 만드는 법’이란 주제로 실시한 테드(TED) 강연에서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소개했다. 34~93세의 미국 성인 1,000명을 추적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가족의 사망이나 경제적 위기와 같은 스트레스 요인은 일반적으로 사망 위험성을 30% 증가시켰다. 하지만 타인에게 관심을 쓰는데 시간을 보낸 사람들의 사망 위험성은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보살핌이 회복력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가피하게 다양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 악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고 그 핵심에 타인에 대한 관심 및 배려, 즉 공감 능력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공감 능력이야말로 인성 또는 인격을 이루는 필수 요소이다.
인성은 비단 스트레스로부터의 회복력 증진뿐만 아니라 창의성과도 관련이 있다. 교수법 및 공학교육 관련 국내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인 조벽 동국대 석좌교수는 지난해 한 일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가 아는 인재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인성”이라며 “인성은 창의력의 핵심이며 이를 입증하는 연구결과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창의력의 핵심은 머리로 하는 ‘인지적 능력’에 마음으로 하는 ‘정의적 능력’이 더해지는 것이며, 교사들은 이런 교육경험을 디자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여기서 적정기술에 대한 교육이 의미를 갖는다.
적정기술은 인간 중심의 기술
적정기술은 인간 중심의 기술로서 사용자가 처한 환경과 필요를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다시 말해 인간에 대한 이해, 배려, 공감이 없으면 쓸모 있는 적정기술 제품을 만들기가 어렵다.
2012년 8월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한밭대 적정기술연구소는 대전지역 중고교 과학교사들과 연계해 ‘세상을 바꾸는 희망의 기술’이란 주제로 ‘제1회 고등학생 청소년 적정기술캠프’를 개최했다. 100여명의 대전 지역 고등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적정기술 특강, 라이프스트로 등 개도국 대상 적정기술 제품 체험, 아프리카 유학생과 함께 한 태양열 조리기 제작, 적정기술 동아리 활동 소개(당시 대전 4개 고등학교에 적정기술 관련 동아리가 있었다), 적정기술에 대한 문제를 풀어보는 ‘적정기술 골든벨’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최초의 고등학생 대상 적정기술 캠프로 참여 학생과 교사 모두 큰 만족감을 표시했지만 필자에게는 한 가지 아쉬움이 남았다. 적정기술은 사용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 인간 중심의 기술인데, 학생들이 개발도상국의 사정에 대해 잘 모르고 개도국 주민을 만나기도 어려워 공감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그래서 2013년 7월에는 ‘인간 중심의 문제 해결자 되기’라는 주제로 제2회 청소년 적정기술 캠프를 개최, 우리 주변의 문제를 학생들 스스로 발견하고 해결하는 방법을 교육하였다. 그 결과가 2013년 12월과 2014년 8월 제1,2회 청소년 인간 중심 문제해결 경진대회로 이어졌다.
해결책 찾는 도구 ‘디자인 사고’
청소년 적정기술 프로젝트에서는 인간 중심 문제해결의 방법론으로서 ‘디자인 사고’를 사용한다. 국내 유수의 디자인 컨설팅회사인 PXD의 이재용 대표는 디자인 사고를 “디자인 분야에서 시작된 혁신프로세스와 사고방법으로서, 인간을 관찰하고 공감하며 소비자 및 전문가들과 협업해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고, 통합적 사고 및 테스트를 반복해 최선의 답을 찾는 창의적 문제해결 방법의 구체적 형태”라고 정의한다. 국내에서는 디자인 사고 도구로서 미국 스탠포드대 d스쿨에서 사용하는 ‘공감하기-문제 정의하기-아이디어 내기-프로토타입 만들기-테스트하기’의 5단계가 많이 사용된다.
먼저 공감하기에 대해서 설명하면 사용자에 대한 공감은 연민과는 다르다. 공감이란 “다른 사람을 자세히 관찰하고, 관찰한 것에 대해 질문하고, 주의해서 경청함으로써, 상대방과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의 유대감을 느끼고, 상대방이 느끼는 것을 동일하게 느끼는 것”을 말한다. 영미권에서는 이를 ‘상대방의 신발을 신고 걷는 것’이라고 표현하며, 동양 문화권에서는 ‘이심전심’이란 설명이 적절할 것이다.
교사 등에 의해 탐구 주제가 정해지는 다른 창의성 교육과 달리 청소년 적정기술 프로젝트에서는 청소년들이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고, 인터뷰 등을 통해서 타인과 공감하며,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문제를 도출한다. 도출된 문제는 관점서술문이라는 것을 통해서 표현되는데, “a는 b하기 때문에 c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와 같은 형태를 띈다. 관점서술문이 공감과 이해를 표현하고, 뻔하지 않은 통찰력을 보여주고, 분명하고 간결하며, 디자인작업에 대한 방향성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관점서술문을 작성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우며 연습이 필요하다.
학생들은 도출된 문제에 대해서 브레인스토밍, 트리즈(TRIZ?문제해결 방법론 중 하나), 특허 조사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서 아이디어를 내고 프로토타입(시제품)을 제작한다. 프로토타입은 완벽할 필요는 없고 사용자에게 경험을 제공할 수 있으면 된다. 학생들은 다양한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테스트를 통한 피드백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개선한다.
남 도우며 성장하는 청소년들
지난 2년 동안 개최된 청소년 인간중심 문제해결 경진대회를 통해서 학생들은 다양한 문제들을 스스로 발견하고 해결하였다. 그간 다뤄진 주제는 책상, 안경, 비닐하우스, 우산, 산악지팡이, 청소도구, 물 백묵 등등 실로 다양하다. 예를 들면 남학생들로 구성된 충남고 WTS팀은 학교 주방에서 근무하는 분들을 인터뷰해 “주방의 위험한 작업도구들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관점서술문을 도출한 후 안전한 과일 깎기 도구를 제작했다. 대전성모여고의 솔루션팀은 농업에 종사하는 분을 인터뷰해 “농업인 모씨는 비닐하우스를 폭설에 견디도록 하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관점서술문을 작성하고 비닐하우스의 눈을 제거하는 장치를 제작하였다. 대전괴정고의 슈룹팀은 사람들이 우산을 쓰면서 머리카락이 끼는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였으며, 대전여고의 4U팀은 물 백묵을 사용할 때 잉크가 잘 나오지 않아서 선생님들이 고생한다는 문제점을 해결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적정기술미래포럼 블로그(www.approtech.or.kr)에서 볼 수 있다.
청소년 인간중심 문제해결 경진대회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A 학생은 “이번 대회를 통해서 인간중심 디자인 쪽으로 진로를 생각하게 됐다. 다른 사람의 불편한 점을 계속 찾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진심으로 이 분야에 관심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B 학생은 “사소한 일이지만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찬지 새삼 깨달았다. 나 자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C 학생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모든 것에 자신이 있고 학업 성적도 좋은 학생인데, “함께 하는 친구들이 많은 도움을 줘서, 나도 못하는 것이 있고 필요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살아야겠다”며 가치관의 변화를 드러냈다.
어른들은 청소년들이 즐겁게 가정, 학교 및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의무가 있다. 바른 인성교육과 이에 기초한 창의성 교육이 진정한 의미의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 여기서 소개한 청소년 적정기술 프로젝트가 교육 커리큘럼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홍성욱·국립한밭대 적정기술연구소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