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분들의 페이스북은 어땠을지 모르겠다. 내 타임라인은 요 며칠간 무지개색으로 물들었다. 동성애 문화를 상징하는 여섯 색의 무지개가 페이스북 친구들의 프로필을 덮었다. 페이스북이 동성애 합법 판결을 기념하기 위해 프로필 사진에 무지개색을 입힐 수 있는 필터 ‘셀러브레이트 프라이드(celebrate pride)’서비스를 제공한 것. 6월 29일까지 페이스북 이용자 중 2600만명이 자신의 프로필을 무지개색으로 물들였다고 한다.

타임라인을 밀어 올리는 데 묘한 감동이 있었다. 차별을 배척하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자의 행복을 존중하는 것. 무지개가 뜬다는 건 그런 의미지만, 세상이 빨갛기만을, 파랗기만을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억지로 남의 얼굴에 한 가지 색을 그려 넣는다. 밖에선 그런 야만이 판 친다.
지난달 28일, 시청 앞 광장에서 제 16회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 판결이 난 뒤였다. 날도 화창하고 다들 신났다. 광장 한 구석에서 묘하게 더 신이 나 보이는 분들이 있었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동성애 반대 집회를 나온 사람들이었다. 북소리가 요란했다. 반(反) 퀴어 집회가 있어서 더 축제가 시끌벅적했다. 동성애자였던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맞춰 발레를 추면서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하는 사람들. 한복을 차려입고 ‘한국의 전통적 관념’과 맞지 않다며 동성애 반대 공연을 했다. 어찌나 열정적이었는지, CBS newspath는 트위터를 통해 이들을 퀴어문화축제의 축하 공연팀이라고 잘못 보도했다. 참으로 적극적이고 뜨거운, 열과 성을 다한 혐오다.

이 퀴어문화축제의 풍경 안에서 혐오는 야만스럽고 촌스러웠다. 열과 성을 다한 혐오가 즐거운 사랑 연대와 같은 프레임에 담겼다. 그러니 당연히 질 수 밖에 없다. 혐오를 이기는 법은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야만은 낡은 것. 사랑과 연대는 새 것이다.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는 말을 실감했는데, 사실 강하다는 표현보다 ‘세련되다’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 했다. 혐오가 너무 후져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이런 저런 혐오가 넘친다. ‘혐오’라는 건 감정에 관한 명사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혐오는 ‘뭘 좋아하냐, 싫어하냐’ 하는 얘기에서 나온 말이고, 이건 감정 취향 기호라고 전제한다. 동성애 혐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래서 “싫어하는 것도 내 자유”라는 말을 그렇게들 많이 하나보다. 어디까지나 판단은 개인의 취향이라고 한다. 그 영역을 넘어서까지 누군가에게 동성애를 찬성하라고 강요해선 안 된다고.
그런 강요가 누군가를 위협하는 걸 나는 본 적이 없다. 자존심을 건드렸을 순 있겠다. 논쟁에서 이길 것이냐, 질 것이냐. 동성애에 찬성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 사회는 아직 오지도 않았다. 실질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는가. 그런 맥락에서 따질 거면 성적 소수자 동아리에서 내건 현수막이 찢기고, 커밍아웃이 어려운 현실을 먼저 봐야 하지 않나.
생각의 경로가 짧다. 좋고 싫음이 찬성, 반대와 같을 수 없다. 자신이 싫다는 이유로 당당하게 남의 삶에 ‘반대’를 표하는 것은 뻔뻔함이고 야만이다.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사람도 차별에 찬성한다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 차별에 찬성한다는 사람도 폭력에 찬성한다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말이 아니다. 2014년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발표한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 최종보고서」를 보면 ‘차별이나 폭력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41.5%에 달했다. 불편할 수 있다.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 불편함을 마음에만 잘 담아두는 정도로도 충분하다. 굳이 야만을 자랑할 필욘 없다. 찬성이나 반대란 말 자체도 이상한 것이다. 남의 연애사를 두고 찬반을 논하는 게 아닌가.
“싫어하는 것도 내 자유”란 이야기를 들으면 초등학교 때 말싸움이 생각난다.
“니 맘만 있냐, 내 맘도 있다!”
이건 싸움을 끝내는 필살 멘트다. ‘니 맘’,‘내 맘’!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게 아니고 이런 말은 사실 “너랑 더 얘기하기 싫다”는 말인 걸 알겠다. 서로 얘기할 중간 지대가 없으면 ‘니 맘’,‘내 맘’만 남는다. 개인만 남는 호불호의 대결 구도다.

보기 싫으니 찢는다. 얘기를 들을 마음도 없다고, ‘극혐(극도로 혐오스럽다)’이라며 조롱한다. 이런 식의 소통이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게 ‘대자보 훼손’이다. 올해 봄 학기 부산대에선 대자보 훼손을 막는 혐오 대응팀이 만들어졌다. 모임 이름은 ‘찢지 마’다. 학내에 붙은 성소수자 관련 현수막과 대자보가 고의적으로 훼손된 사건이 있었다. 개강에 맞춰 부산대 내 성소수자 인권 동아리 QIP(Queer In PNU)가 성소수자를 환영한다고 내건 현수막이었다.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혐오 표현 대응팀 '찢지 마'와 부산대 6개 학생단체는 새로운 대자보 서른 다섯 장을 학교에 붙였다. 대자보엔 이렇게 써있었다. '찢지 마, 지우지 마, 부활할 거야'.
개인의 취향이라 동성애를 존중하자고 하는 것일까? 취향과 취향의 대결, 호불호의 대결이 아니다. 차별의 문제다. 폭력의 문제다. 야만이 판치는 사회다. 혐오도 ‘취향이니 존중해달라’는 사람들에게, 논리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생각한다. 이번 퀴어 퍼레이드를 보면서 느꼈다. 야만은 촌스럽고, 혐오는 낡았다. 이런 구도를 드러낼 수 있는 경험이 많아지는 게 가장 중요할 것이다. 혐오는 존중받아야 할 취향이 아니라, 야만이다.
칼럼니스트
썸머 '어슬렁, 청춘' ▶ 시리즈 모아보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