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불황의 미각, 식지 않는 단맛 열풍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불황의 미각, 식지 않는 단맛 열풍

입력
2015.07.02 15:51
0 0

허니버터칩 이어 순하리 소주 대박, 백종원의 설탕 듬뿍 레시피도 인기

생과일 디저트 내세워 특급호텔들 당도 전쟁 가세

단맛 열망은 열량 축적하려는 본능… 경제난·스트레스에 소비 급증

경기 불황은 단맛에 대한 갈망을 일으킨다. 달콤한 케이크 위에 각종 베리를 얹은 쉐라톤 서울 디큐브시티의 과일 디저트 '올 어바웃 베리&체리'. 쉐라톤 서울 디큐브시티 제공
경기 불황은 단맛에 대한 갈망을 일으킨다. 달콤한 케이크 위에 각종 베리를 얹은 쉐라톤 서울 디큐브시티의 과일 디저트 '올 어바웃 베리&체리'. 쉐라톤 서울 디큐브시티 제공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0년 4월 ‘인생은 달콤하다’라는 제목으로 미국의 설탕값 폭등 기사를 실었다. 건강의 적으로 지탄받으며 20여년간 폭락세를 면치 못하던 설탕값이 2008년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2009년 전년 대비 2배 증가로 놀랍게 반등한 것이다. 이 해에만 설탕 소비가 전 세계적으로 150만톤 가까이 증가할 것이라는 미 농림부의 추정치까지 제시됐다.

이즈음은 2007년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던 때. 이코노미스트는 “전 세계가 게걸스럽게 설탕을 소비하면서 세계인의 입맛이 점점 더 단맛에 길들여져 가고 있다”며 “경제불안이 야기한 위안 음식(comfort food)에 대한 욕구가 설탕값의 폭등을 불러왔다”고 분석했다. 씁쓸한 현실일수록 달콤한 음식을 갈구하게 되는 역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면, 단맛은 우리를 행복케 한다.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달콤한 과일로 불황기의 미각을 사로잡으려는 호텔들의 노력은 셰프 이름을 붙인 디저트메뉴를 낳았다. 왼쪽부터 더 플라자 호텔의 조창연 셰프가 만든 디저트 피자, 송현주 셰프의 선샤인 파르페, 김도연 셰프의 망고 패션후르츠 셔벳. 더 플라자 제공
달콤한 과일로 불황기의 미각을 사로잡으려는 호텔들의 노력은 셰프 이름을 붙인 디저트메뉴를 낳았다. 왼쪽부터 더 플라자 호텔의 조창연 셰프가 만든 디저트 피자, 송현주 셰프의 선샤인 파르페, 김도연 셰프의 망고 패션후르츠 셔벳. 더 플라자 제공

단맛, 한국인의 혀를 지배하다

지난해 여름 허니버터칩으로 시작된 단맛 열풍이 꺼질 줄을 모른다. 영남권 소주로 소심하게 출시됐던 롯데주류의 유자맛 소주 ‘처음처럼 순하리’가 전국구 소주로 맹위를 떨치며 유사품 속출을 야기한 데 이어 ‘설탕 폭포’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외식사업가 백종원씨의 설탕 팍팍 친 레시피가 평범한 주부들의 식탁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마치 달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는 암묵적 합의라도 존재하는 듯한 분위기다.

특급호텔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건강과 고급이라는 키워드를 포기할 수 없는 호텔들은 저마다 당도 높은 여름 과일들을 디저트로 앞세워 치열한 ‘브릭스(Brixㆍ당도 표시 단위)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미 1월 딸기 프로모션으로 한 차례 대전을 치른 호텔가는 망고, 리치 같은 열대과일부터 체리, 수박, 복숭아 등 다양한 과일을 호텔의 시그니처로 내세우며 디저트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수년째 지속되고 있는 디저트 열풍에 태양이 빚어낸 여름 과일의 단맛으로 액센트를 찍으려는 전략이다. 본말이 전도된 것 아닐까 싶게 디저트에 주력하는 호텔가의 모습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설탕이나 시럽 같은 인공감미료와 가능한 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써왔던 모습과 대비되며 우리 사회에 휘몰아친 단맛 시장의 위력이 얼마나 거센지를 보여준다.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이 내세운 망고와 리치 디저트를 보자. 단순히 과일로만 먹는 게 아니라 리치&망고 슈, 망고&코코넛 크럼블, 리치 파나코타, 패션 크림 롤 케이크, 망고&리치 티라미수 등 시그니처 과일을 이용한 다양한 디저트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디저트 뷔페 형식(주말)으로 제공된다. 평일에는 애프터눈 티세트로 나온다. 식사 대신 디저트로 한 끼를 대신하는 젊은 여성들이 주 타깃이다.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이 내놓은 ‘썸머힐 수박’은 고당도 수박을 주문 즉시 착즙해 내놓는데 “별도의 감미료 없이 만드는데도 시럽을 넣었는지 문의하는 고객이 있을 정도”로 수박의 당도에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 라스베리 밀푀유, 체리가 올려진 카눌레, 에클레어, 마카롱, 몽블랑 타르트, 블루베리 치즈케이크 등 달콤한 디저트가 즐비한 리츠칼튼 서울의 ‘리츠 티저트(Ritz Teassert)’도 우리의 미각을 지배하고 있는 단맛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곱게 간 눈꽃얼음에 딸기 샐러드와 셔벗을 올리고 금가루를 뿌린 후 샴페인 돔 페리뇽을 뿌려주는 JW메리어트 동대문의 돔 빙수는 2인에 8만원이라는 국내 최고가에도 인기를 끌고 있고, 더 플라자는 아예 레스토랑 셰프의 이름을 붙인 독창적 과일 디저트를 새로 출시했다.

이 같은 과일 열풍에 대해 차승희 웨스틴조선호텔 식음기획 과장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늘어 신선한 과일에 대한 욕구가 늘어난 것도 이유지만, 과일만이 줄 수 있는 달콤한 향과 고유의 식감을 즐기려는 고객들의 욕구가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의 '프로즌시위트-과일빙수'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의 '프로즌시위트-과일빙수'
리츠칼튼호텔의 '리츠 티저트'.
리츠칼튼호텔의 '리츠 티저트'.
노보텔 앰배서더 강남의 '웰컴, 서머 드링크'
노보텔 앰배서더 강남의 '웰컴, 서머 드링크'

경제 불황에는 달콤한 음식이 뜬다

음식이 달아지는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엔고현상으로 일본 관광객들이 밀물처럼 들이닥쳤던 2009~2012년, 한류관광 1번지였던 서울 중구 명동의 음식들-특히 길거리 음식들-은 단맛 일변도로 변모하는 경향을 보였다. 떡볶이도 달고, 냉면도 달고, 불고기도 달고, 갈비도 달아졌다. 내국인이 먹기에는 지나치다 싶게 단 음식들도 많았지만, 지금까지도 그 추세는 지속되고 있다.

과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특정 미각에 대한 갈망은 몸이 스스로 필요로 하는 것을 표현하는 일종의 신체 언어다. 오늘날 달고 기름진 음식에 대한 갈망은 가능할 때 많은 열량을 체내에 축적해둬야 한다는 선사시대적 욕망의 흔적이라는 게 널리 알려진 진화론의 설명이다. 생존기제로서 고열량이 가져오는 수혜에 여전히 반응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우리 몸이 충분한 영양 상태에서도 설탕과 지방을 갈망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에 스트레스와 불행감이라는 심리적 요인까지 결합되면, 설탕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려워진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우리 몸이 만들어내는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은 외부 위협에 맞서기 위해 최대의 에너지를 생성해내는 것이 목표인 호르몬이다. 식욕억제 단백질 렙틴의 분비를 막아 아무리 먹어도 허기진 느낌을 증가시키는, 말하자면, 못된 호르몬. 자꾸만 단 음식에 손이 가는 이유는 코르티솔 때문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단 음식은 모르핀이나 아편 같은 진통성분을 가진 호르몬 오피오이드를 분비시켜 확실하게 고통을 경감시키는 효과가 있다. 애덤 드루노스키 미국 미시건대 교수는 1996년 실험을 통해 초콜릿을 먹으면 뇌에서 엔도르핀 등 희열 유도 화학물질이 분비되는 것을 입증했다.

혀에 즉각적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단맛은 유아기를 지배하는 미각이다. 그래서 초콜릿이나 사탕, 케이크 등 달콤한 음식들을 보상 음식이라고도 부른다. 단맛이 고기나 생선 같은 고급 식재료에서는 잘 나지 않는 맛이라는 점도 절묘하다. 우리에게 만성적 우울과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키는 근본적인 요인은 대체로 경제난이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요 무대로 등장해 유명해진 디저트 카페 페이야드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게 전 세계가 금융위기로 흔들렸던 2008년 3월. ‘밥 대신 디저트’의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한 신개념 식당의 등장 시기는 과연 우연이었을까. 크리스피 크림 도너츠가 미 경제 대공황 시기에 생겨난 게 우연이 아니었던 건 확실하다.

CJ제일제당 쁘띠첼 유정민 브랜드 매니저는 “불황이 지속되고 실질소득이 하락함에 따라 사람들이 소유보다는 경험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고 순간에서 느끼는 행복함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그런 면에서 가장 쉽고 빠르게 변화하는 것이 맛, 그 중에서도 적은 돈으로 만족감을 극대화할 수 있는 단맛 선호”라고 설명했다. 씁쓸한 인생에 달콤한 음식. 단맛은 지금 이 시대, 우리의 본능이 원하는 맛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