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이덕일의 천고사설] 표절(剽竊)

입력
2015.07.02 11:25
0 0

조선시대 표절(剽竊)은 과거 때 책자를 갖고 들어와 베끼는 행위를 뜻했다. 과거용 답안지 모음인 ‘초집(抄集)’을 베끼는 행위였다. 세종은 재위 11년(1429) 국학(國學ㆍ성균관)에 행차해서 직접 시험을 주관했는데, 많은 답안지가 권맹손(權孟孫ㆍ1390~1456)이 초시(初試) 합격자 대상의 도시(都試)에서 장원(壯元)한 ‘진빈풍도(進?風圖)’의 전(箋)을 표절(剽竊)한 것이었다. ‘시경’ ‘빈풍(?風)’에 대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유명한 독서가인 세종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세종은 “평상시의 제술(製述ㆍ글을 짓는 것)일지라도 초집(抄集)을 표절했다면 진실로 이치를 아는 유생(儒生)들의 할 바가 아닌데 하물며 내가 직접 임해서 선비를 시험하는 때이겠는가”(‘세종실록’ 11년 5월 28일)라고 한탄했다. 그래서 세종은 재위 14년(1432) “지금부터는 고문(古文)을 공부하지 않고 선배 합격자들이 지은 것을 뽑아서 기록한 것을 표절하거나 펼쳐보는 자”에 대한 처리 방침을 정했다.

즉 과거 수험생들을 수색해서 답안 작성용 책자를 학교 안에 가지고 와서 펴보는 자는 1식년(式年ㆍ3년) 동안 과거 응시를 중지시키고, 시험장 안에서 발각된 자는 2식년, 즉 6년 동안 중지시켰다. 그러나 선조 때 문신인 율곡 이이(李珥)가 자신이 주관하는 석담서당(石潭書堂)에 ‘과문초집(科文抄集ㆍ초집)’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로 봐서 과거 합격을 위한 초집 베끼기나 외우기는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ㆍ1762~1836)은 선배인 복암(伏菴) 이기양(李基讓ㆍ1744~1802)이 소갈병(消渴病)으로 드러눕자 문병을 갔다. 소갈증은 갈증이 나서 물을 많이 마시지만 갈증은 없어지지 않고 여위는 병인데 의원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약용은 이기양이 복용하고 있는 여러 처방전을 보고서 “의가(醫家)에 약초(藥草)가 있는 것이 문가(文家ㆍ문장가)에 문자(文字)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옛날의 의자(醫者ㆍ의사)는 약초의 뿌리뿌리마다 그 성질을 판별하여 그 병에 알맞게 사용했는데, 후세에는 만들어진 처방문을 가지고 모든 병에 쓰고 있으니 의술이 이 때문에 오염되었습니다. 옛날 문자(文者ㆍ문장가)는 글자글자마다 그 뜻을 판별해서 그 이치에 맞게 사용했는데 후세에는 만들어진 문구를 외워서 모든 곳에 표절하니 문장이 옛날보다 못하게 된 것입니다.”

베개에 기대어 신음하던 이기양은 이 말을 듣더니 몸을 일으켜 앉아 용모를 가다듬고는 정약용의 손을 잡고 큰 소리로 “어찌 말이 이렇게 이치에 맞을 수가 있는가? 그대의 말을 들으니 내 가슴이 시원한 것이 청량산(淸?散) 한 첩보다 낫네”라고 말했다(정약용 ‘몽학의휘서(蒙學義彙序)’). 정약용은 의학서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할 정도로 의학에도 저명했으므로 이기양의 약처방이 고식적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조선의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ㆍ1563~1589)은 여러 차례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 허난설헌에 대해서 서애 류성룡은 “기이하도다…허씨 집안에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재가 어찌 이리 많다는 말인가?”라고 칭찬했으나 신흠(申欽)은 “혹은 말하기를 그 남동생 허균이 세간에서 발견하지 못한 시편을 표절해서 몰래 끼어 넣어 그 이름을 드리우려 했다는데, 이 말이 그럴 듯 하다”(신흠 ‘청창한담(晴窓軟談)’ 하)”고 정반대로 비판했다.

이수광(李?光ㆍ1563~1628)도 ‘지봉유설(芝峯類說)’의 ‘규수(閨秀)’에서 허난설헌이 표절했다고 비판했다. 허난설헌이 지은 ‘봉선화로 손톱을 물들이며(染指鳳仙花歌)’라는 칠언고시(七言古詩)가 명나라 사람의 시구를 모방한 것이라는 것이다. 양유정(楊維楨ㆍ1296~1370)의 ‘손톱을 물들이다(染指)’를 베꼈다는 것인데 양유정은 명나라가 아니라 원나라 시인이다. 허난설헌의 “때마침 붓을 쥐고 초생달 그리는데, 붉은 꽃비 봄산을 지나는가 의심스럽네(時把彩毫描却月 只疑紅雨過春山)”라는 시구가 양유정의 “거울을 닦으니 화성이 달빛에 흘러가고, 눈썹 그리니 붉은 꽃비가 봄산을 지나네(拂鏡火星流夜月 ?眉紅雨過春山)”라는 구절을 베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ㆍ1628~1692)은 허난설헌의 위작설에 대해서 “가소로운 일”이라고 비판한 것처럼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작가 신경숙의 표절 문제로 시끄럽다. 필자도 한때는 소설광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소설을 보지 않게 되었다. 소설이 서사(敍事)구조를 잃어버리고 ‘문장 다듬기’로 흐르기 시작하던 무렵인 것 같다. 문장의 표절 여부도 중요하지만 왜 한국 소설이 독자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는지, 왜 한국 소설이 사소설(私小說)들의 판이 되었는지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작가와 평론가가 출판사를 매개로 ‘문학권력’이란 성을 쌓았다는 자체가 정상궤도에서 크게 이탈했다는 뜻이다. 하긴 정상궤도에서 크게 이탈한 것이 문학뿐인 사회는 아니지만.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