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라는 말엔 사람 냄새가 난다. 어릴 땐 잘 몰랐지만, 나이가 들수록 ‘동네’가 끌린다. 동네라는 걸 잘 몰랐던 유년시절에도 본능적으로 난 동네에 이끌렸던 기억이 난다. 강남의 아파트 숲 속에 살아서 동네의 감정을 많이 느껴보진 못했지만, 어린 시절 가끔씩 친척집에 가면 이상하게도 집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친척들이 살았던 동네는 하나같이 비탈지고 약간은 낡은 집들이 있었다. 그 사이론 다소 음산한 점집이 있었고, 동네 마다 조그만 시장이 있었다.
세검정, 보광동, 경리단길. 친척들이 살았던 이 동네들이 뭐가 그리 좋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그 동네들의 풍경이 내겐 전형적인 ‘동네’의 모습으로 기억돼 있다는 사실이다. 문방구와 철물점에서 필요한 것을 사고, 파출소 옆에는 살짝 녹슨 자전거가 서 있는 세탁소가 있다. 비탈길가에는 빨간 고추를 직접 말리고 빻아 고춧가루를 파는 방앗간과 쌀가게가 있다. 재래시장엔 한 아름이 채 안 되는, 그루터기처럼 생긴 투박한 도마에서 생선을 다듬는 아주머니와 온갖 나물거리들을 바구니에 담아 파는 할머니가 계신다.
경리단길은 특히나 내 기억 속에서 가장 ‘동네스러운’ 곳이었다. 동네가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과 몇 년 새 경리단길은 젊고 힙하고(Hip하다: 세련되고 현대적이라는 뜻의 영어식 은어) 색다른 곳이 됐다. 주말이면 말끔하게 차려입은 트렌드세터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처음엔 ‘경리단길이 재미있는 동네로 변해가는구나’정도로 생각했다. 그 즈음 경리단길에서 작은 가게를 하는 후배 요리사에게서 “어디선가 큰 돈이 들어오고, 유행이 생겨나니 월세와 권리금이 오르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만 해도 자영업자들의 당연한 푸념 정도로 생각했다. 되레 ‘장사 잘되겠네?’ 하고 눙쳐 말했다.
그리고 3년 전 그 생각이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찾은 경리단길은 사람냄새 나던 예전의 동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세탁소가 보이지 않았고, 철물점도 없어졌다. 작은 가게라도 오랫동안 하며 살고 싶다던 그 후배의 가게 자리엔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이 들어서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경제적 이윤을 추구한 건 탓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사람냄새가 은은하던 동네가 콘크리트 냄새가 진동하는 곳으로 변하는 데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일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다. 동네 주민 누군가에겐 꼭 필요했던 철물점, 방앗간, 세탁소 같은 작은 가게들이 사라졌고, 그 자리엔 방문객을 위한 디저트 카페와 식당들이 들어섰다. 그리고 원주민은 하나 둘 동네를 떠난다. 비단 경리단길 얘기만은 아니다. 내가 어릴 때 살았던 가로수길이 그랬고, 압구정동과 홍대 거리도 마찬가지다. 내 기억 속 ‘동네’들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이른바 ‘동네밥집 프로젝트’. 우선 제법 큰 재래시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장이 있는 동네를 찾아 작은 식당을 차린다. 이탈리안 레스토랑도, 일식이나 중식, 한식당도 아니다. 그냥 밥집이다. 쌀은 동네 쌀가게에서 산다. 좌판에서 야채를 파는 할머니에게서 반찬거리를 사서, 동네 방앗간에서 짠 참기름으로 나물을 무쳐 내놓는다. 요샌 찾기 힘들지만 빨간 전등이 달린 동네 정육점에서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몇 근씩 끊어다가 그날그날 요리하고, 동네 닭집에서 산 달걀과 닭으로 요리한다. 적어도 동네 작은 가게들이 문을 닫지 않도록, 동네상권이 유지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그게 내가 요식업을 하면서 ‘동네’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2년이면 될 것 같다. 대한민국 어느 동네에서 그런 밥집이 문을 열기까지 말이다. 이름은 ‘고삿의 동네밥집’. 마을의 좁은 골목길에 있는 밥집이란 의미다. 밥하기 싫은 주말 저녁 가족과 손잡고 이런저런 가게 사람들과 인사 나누며 동네 밥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는 모습은 얼마나 평화로울까. 그 풍경 속에서 내가 꼭 손 붙잡고 걸어가는 가족은 아니더라도, 밥집 사장으로나마 함께 하고 싶다. 그래서 난 꼭 그런 동네밥집을 해야겠다. 여러분도 그 때가 되면 한번쯤 오시면 좋겠다.
요리사
레이먼 김 '포스트 Eat' ▶ 시리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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