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당국 홈피에도 원론적 안내만
구체적 방법은 스스로 해결해야
일부 격리자 돌발행동 눈살 등
시민들 도덕적 해이도 있었지만
신뢰 잃은 보건당국 시스템이 문제
“어떻게 해야 한다는 지침도 주지 않고 집에만 있으라고 하니 내가 하는 행동이 맞는 건지 틀린 건지 알 수 없어 답답했습니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확진자와 같은 시간대에 병원에 머물러 지난달 20일부터 2주가량 자택에 격리됐던 A(38ㆍ여)씨는 1일 격리 기간의 답답했던 심정을 이같이 말했다. 보건당국이 자가 격리자가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에 대해 모호한 행동요령만 줘, 일상에서 감염을 막기 위한 구체적 방법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는 것이다.
가령 A씨는 먹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와 기침 때문에 침이 튀었을 옷 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궁금했다. 하지만 보건당국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세탁 철저ㆍ집안 내 거주 가족 최소화 등 원론적 지침만 게재돼 있었다. 고민 끝에 A씨는 음식물 쓰레기는 비닐봉지로 두 겹 싸서 냉장고에 얼리고, 빨랫감은 소독제를 넣어 세탁했다. 또 아파트 관리소에서 요구한 위임장을 낼 때는 위임장에 소독제를 샅샅이 뿌린 후 말려서 집 밖에 내놓고 경비원이 가져가도록 했다.
지난달 말 격리에서 해제된 B(53)씨는 격리 기간 부인과 떨어져 사는 등 나름 감염 예방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인이 집으로 와 빨랫감을 가져간 뒤 세탁해다 준 것이 위험한 행동인 줄 뒤늦게 알았다. B씨는 “음성 판정을 받았기에 망정이지 확진 판정을 받았다면 자가 격리 생활을 한 보람도 없이 집사람도 격리 대상이 될 뻔 했다”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이번 메르스 사태 동안 격리를 경험했거나 격리 중인 시민은 1만6,000여명에 이른다. 하지만 보건당국의 격리 지침이 허술해 위생 관리와 감염 예방은 상당 부분 개인의 몫으로 떠넘겨졌다. 보건당국은 격리 초기 격리자들을 위한 1주일치 분량의 생필품을 가져다 주고 하루에 두 차례 전화로만 상태를 체크했을 뿐이다. A씨는 “전화가 오는 시간대에만 집에 있고 다른 시간대에는 돌아다녀도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라며 “무조건 격리하라고만 할 게 아니라 구체적 행동 지침을 알려줬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대부분의 격리자들은 시민의식을 발휘해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무언의 약속’을 묵묵히 지켜냈다. 확진자가 다녀간 병원에서 근무했던 김모(69ㆍ여)씨는 격리로 인해 20년 넘게 해오던 새벽기도도 중단했고, 격리가 끝난 지금도 가지 않고 있다. 김씨는 “만의 하나 가능성 때문에 메르스 사태가 안정됐다는 말이 나오기 전까진 안 나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격리자들의 돌발 행동과 도덕적 해이는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자가 격리 대상임에도 “답답해서 바람을 쐬고 싶다”며 친구들과 전북 고창의 골프장을 찾은 50대 여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메르스 사태를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사례도 나왔다. 지난달 12일 오전 2시23분쯤 경기 과천경찰서에는 “여자친구가 메르스에 걸렸는데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20대 남성의 신고가 접수됐다. 확인 결과 함께 술을 마신 후 택시를 타고 간 여자친구가 전화를 받지 않자 소재지를 확인하기 위해 술김에 메르스 환자라고 허위신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남성은 즉결심판에 넘겨져 2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또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달 2~30일 자가 격리 중 연락이 두절돼 경찰이 찾아 나선 건수는 591건에 달했다. 메르스 관련 허위 신고에 따라 즉결심판에 넘겨진 사건도 17건이나 됐다.
메르스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운 얌체족도 나타났다. ‘메르스 바이러스를 99% 차단한다’거나 ‘면역력이 400% 증가한다’며 이동식 소독기나 건강식품을 허위ㆍ과장 광고하는 업체가 속속 나타났다. 또 품귀 현상을 보이는 마스크와 소독제의 가격을 올려 파는 약국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미숙한 시민의식을 지적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국가의 시스템 부재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분석했다. 엄중식 한림대 감염내과 교수는 “새로운 유형의 질병에 방역당국이나 시민 모두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디테일이 부족한 자가 격리 지침 등 엉성한 시스템으로 혼란을 초래한 점은 이번 기회를 통해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상학 한양대 사회학과 교수는 “자가 격리는 시민의 자발적인 협조에 근거한 규제책인데 이미 메르스 발생 초기에 보건당국에 대한 신뢰가 깨졌기 때문에 시민 탓만 할 수는 없다”며 “감염병 예방 같은 공공의료에 대해 국가가 전문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아람기자 oneshot@hankookilbo.com
정준호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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