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일 났다, 큰 일. 조리실에 물난리가 났어요.”
요리수업이 생활의 한 부분이 되어 버린 지난 5월의 어느 날 저녁, 학원에 도착했더니 건물 로비와 복도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미끄러지기 가장 좋은 마찰계수였다. 조심조심 징검다리 건너듯 조리실 안으로 들어서니 그 곳도 마찬가지로 수몰지역이었다. 건물의 하수관로가 터진 것이다. 상수관로도 아닌 하수관로가 터지다 보니 악취도 장난이 아니었다. 건물 전체가 이 모양이라 벼락 청소로는 어림도 없었다. 누가 밸브를 잠갔는지 수돗물도 나오지 않았다.
요리 배운 지 두 달이 다 될 무렵이라 흥미도 반감된데다 장시간 저녁 노동으로 체력도 고갈된 나는 눈이 오히려 번쩍 뜨였다. “파전에 막걸리 한 사발 합시다.” 20대 중반에서 60대 후반까지 7명의 수강생이 다들 바빠서 회식도 한 번 못했던 터였다. 어차피 수업도 어려운 상황이라 친교의 시간을 갖는 것이 차선책이었다. 타이틀은 ‘현장 요리 견학’이라고 달았다.
회식은 급조됐는데 장소가 문제였다. 시계는 벌써 7시20분을 넘고 있었고, 밤 10시 넘어 학원으로 돌아와 지문인식 출석체크를 해야 하는 터라 먼 곳으로 정하기는 무리였다. 그 때 안테나에 잡힌 곳은 바로 걸어서 5분 거리의 서문시장이었다.
두 달 가까이 학원을 다니면서 어떻게 국내 최대 전통시장 중 하나인 서문시장에 태무심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것도 요리학도 딱지를 달고 말이다. 서문시장은 3만5,000㎡의 부지에 8개 지구, 5,500여 점포, 3만여 명의 상인이 생활의 터전을 삼고 있는 삶의 현장이다. 한복과 액세서리, 이불, 의류, 그릇, 청과, 건어물, 해산물 등 다양한 품목이 거래되는 이곳은 말 그대로 없는 것이 없는 장터다. 전통시장이 대형마트 때문에 설 자리를 잃고 있지만 값도 싸고 물건도 싱싱한 서문시장의 경쟁력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그런데 옥에도 티가 있었다. 어슬렁어슬렁 걸어 서문시장에 가 보니 등한시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후 7시30분밖에 안 됐는데도 서문시장은 파장, 그 자체였다. 공식 폐장시각이 오후 6시30분이니 말 다했다. 일을 끝내자마자 학원으로 달려오기 바쁜 마당에 낮 시간에 서문시장을 들를 일은 거의 없는데다 땅거미가 지면 철시를 해 버리니 이곳과 나의 인연은 크게 없는 셈이었다. 직장인 모두 평일에는 서문시장과 담을 쌓고 있는 것이다.
불 꺼진 시장 골목 구석을 누비다 빈대떡 냄새가 구수한 집을 발견했다. 저녁 8시면 문을 닫는다고 써 놓았지만 “손님 계실 때까지 열어 놓심더”라며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강사와 학동 8명이 걸터앉으니 이 가게의 절반은 차지한 것 같았다. 막걸리가 돌고 빈대떡에 안주가 상에 오르고, 강사의 요리품평이 이어졌다. 막내인 20대 중반의 현지는 막걸리 한 잔에 벌써 얼굴이 발그스레하게 달아올랐다. 누가 이것은 술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렸다. 정(情)이라며 또 한 잔 권한다. 수업 땡땡이치고 노는 재미는 어릴 적 학교 다닐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밤 10시쯤 다시 어두컴컴한 서문시장 골목을 나서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구를 관광도시로 만들겠다면서 서문시장을 이렇게 방치해 놓는 것은 직무유기 아닌가?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시장은 관광의 첫째 코스인데, 도시의 역사와 서민들 삶의 숨결이 오롯이 담긴 서문시장을 빼 놓고 관광을 떠드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이 관광 얘기할 때마다 떠오르는 게 있다. 중국 쓰촨성 청두의 먹자골목 진리(錦里)다. 이곳은 중국 촉나라의 거리를 재현한 골목으로 유비와 제갈량의 사당을 모신 우허우츠(武侯祠) 옆에 있다. 홍등 아래로 수공예품과 판다, 가면 등 기념품 가게가 있는가 하면 단단면, 양꼬치구이 등 전통 간식을 파는 거리가 관광객의 발길을 유혹한다.
부르는 것이 값이고, 흥정 만능이라는 중국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정찰제를 지킨다. 전통복장을 한 장인들은 물건값을 깎자고 덤비면 손사래부터 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거리가 조성된 지 11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이곳을 찾았을 때 10주년 기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10년 역사의 진리가 관광객의 발길을 붙드는데, 17세기에 생겨난 서문시장은 왜 안되느냐는 물음이 당연히 드는 것이다.
최근 서문시장에 희소식이 들려온다. 이르면 한두 달 후부터 이곳에서 야시장을 만나게 된단다. 서문시장 상인연합회가 중소기업청 공모 ‘전통시장 특성화사업’에 선정되면서 3년간 50억원을 지원받게 되는데 가장 먼저 시장 내 350m 거리에 야시장부터 조성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 희소식이 있다. 4월 말 대구에는 도시철도 3호선이 개통됐다. 지상 10여m 상공을 누비는 모노레일이다. 3호선 개통 후 교통수요 조사를 해봤더니 이용승객이 가장 많은 역이 서문시장역이었다. 하지만 이곳도 저녁 무렵부터는 이용객이 떨어진다. 퇴근시간이 지나면 적막강산이다. 야시장이 문 열면 서문시장은 밤낮으로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관광명소가 될 것이다.
최근 일요일 대낮에 서문시장에 가 봤다. 조끼 하나 사러 옷가게로 향하는 길이 길고도 길었다. 옷가게 올라가는 3층 계단에서 내려다 보니 칼국수와 잔치국수 등을 파는 노점이 즐비했다. 3,000원짜리 수제비 맛이 그저 그만이었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고, 그냥 서문시장 들렀으니 맛이나 보고가자며 주문한 음식이었는데 바닥을 비우고야 말았다. 숨 돌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가게마다 중국어로 ‘小吃’(간식)이라는 글자가 적혀있고 시장통 한 켠에는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글귀도 중국 간체자로 나부끼고 있었다.
수성못을 산책하다 3호선을 타고 서문시장역에 내려 야시장을 구경할 날을 손꼽아 본다.
jhju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