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보내는 대통령의 저녁 시간
비장한 심정이 독선과 아집 부추겨
자가격리 끝내고 각계 소통 늘려야
박근혜 대통령은 공식일정이 없으면 저녁식사를 대개 청와대 관저에서 혼자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머릿속 시끄러울 요즘만이 아니라 대통령 취임 이후 쭉 그래왔다고 한다. 저녁식사 자리가 아니더라도 비공식적으로 누굴 만나는 일이 드물다. 워낙 동선이 베일에 싸여 있어 우리가 잘 모를 수는 있으나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경호실을 편하게 해주는 대통령이라는 말이 나오는 걸로 미뤄 저녁 나들이나 일정이 적은 건 분명하다.
청와대 관저는 섬으로 불릴 만큼 고립된 공간이다. 밤 시간이 특히 그렇다. MB(이명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이었던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청와대 관저의 밤을 ‘귀곡산장’(鬼谷山莊)에 비유했다. 부인과 아들 등 가족과 함께 했던 MB의 청와대 관저가 그럴 정도였는데 홀홀단신 박 대통령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한때 박 대통령이 특히 귀여워하는 조카들과 동생부부의 잦은 청와대 나들이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지만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20대 후반부터 30여 년이나 혼자 살아온 박 대통령인 만큼 그런 생활에 익숙할지는 모르겠다. 잠자리에 들기까지 집무실에서 가져온 보고서와 자료를 검토하느라 외로워할 시간이 없을 수도 있겠다. 박 대통령은 밤 시간에도 수시로 청와대 수석들과 전화로 연결해 묻고 지시한다고 한다.
하지만 바쁜 와중이라도 적막강산 청와대 관저의 밤은 박 대통령을 비장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비명에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도 자주 날 것이고, 그럴수록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길을 굴하지 않고 가겠다는 생각을 다지고 다질 것이다. 그러면서 현실이 아니라 역사와의 대화에 집착하게 되고 그만큼 현실과의 소통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주 국무회의에서 국회법개정안 거부권 행사와 관련한 박 대통령의 결연한 발언을 보면서 불현듯 청와대 관저의 밤 시간을 떠 올렸다. 발언 마디마디에 서린 분노는 바로 청와대 관저의 그 비장한 밤 시간에 더욱 증폭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본인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애 쓰는데, 자신만의 이익을 취한다고 생각되는 정치인들을 향한 분노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이 저에게 준 권한과 의무를 국가를 바로 세우고 국민을 위한 길에만 쓸 것”이라는 대목에서도 박 대통령의 비장한 심정이 잘 묻어난다.
그런 비장한 심정은 나는 옳은데 너는 틀렸다는 독선으로 흐르기 쉽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정치가 시작된다. 지금 박 대통령은 옳고 그름의 재단만 할 뿐 차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국회선진화법의 제약아래서 어떻게든 야당과 타협해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유승민 원내대표의 생각과 처신은 틀렸고 자기정치일 뿐이다. 그런 원내대표는 용납할 수 없으니 당연히 물러나야 한다는 게 박 대통령의 생각인 듯하다.
박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 민생과 직접 관련 없는 사학법개정과 관련해 2개월여나 장외투쟁을 계속하며 국회를 공전시킨 일이 있다. MB정권시절에는 세종시특별법을 둘러싸고 청와대 및 친이주류 세력과 심각한 대립을 하기도 했다. 그런 경험이 있다면 특정 현안에 대한 야당의 반대, 여당 내의 이견을 무조건 비난하고 억누르기보다 타협점을 찾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지금 모든 것을 옳고 그름으로 접근한다. 당연히 정치의 영역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에겐 지금 다른 생각과 차이를 인정하는 발상의 전환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 적막강산의 청와대 관저의 저녁시간이 아쉬운 것은 그래서다. 이중삼중으로 차단된 그 공간으로 스스로를 자가격리 시킬 게 아니다. 시중의 생생한 목소리와 민심을 듣고, 생각이 다른 당내 비주류인사와 야당 사람들까지도 만나 소통해야 비로소 정치가 산다.
수석논설위원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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