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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º] ‘피란수도 부산’의 세계유산 등재

입력
2015.06.29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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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판오분전’이란 말이 있다. 6ㆍ25 한국전쟁 당시 많은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모여들었을 때다. 당시 부산은 난민수용소나 마찬가지였다. 정확하진 않지만 ‘국제시장’과 ‘40계단’ 주변은 피란민들의 집결지가 됐다 한다. 피란민들을 위해 종종 밥을 배급하곤 했는데 거대한 가마솥에 밥을 다 짓고는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서 “개판 오분 전, 개판 오분 전…”이라고 외쳤다 한다. 개판(開版)오분전은 피란시절 이제 밥이 거의 다 됐고 5분 뒤 솥뚜껑(나무판)을 열겠다는 말이다. 굶주린 난민들은 밥을 먼저 배급 받기 위해 몰려들었고 주변은 아수라장이 됐다. 그런 상황이 개판오분전이다. 개(犬)가 난장판을 벌이는 모습으로 잘못 알려져 비속어처럼 사용하는 이 말엔 사실 우리 부모 세대의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 ‘17일 새벽 3시경부터 약 10시간 폭우를 동반한 제14호 태풍 사라는 남해안 일대를 강타하고 이날 하오 1시경 대한해협을 통과, 동해안 방면으로 북상했다. 이 맹렬한 태풍이 지난 뒤 18일 정오 현재 날씨는 회복됐지만 교통과 전화 두절로 105만 시민의 부산은 완전히 외부와의 고립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전국적으로 사망ㆍ실종 849명, 이재민 37만여명, 특히 부산에 큰 피해를 입혔던 1959년 9월17일 태풍 사라 내습 때의 부산 모습을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당시 B급 태풍 사라가 부산에 엄청난 피해를 낸 데는 사정이 있었다. 태풍이 휩쓸고 간 17일은 마침 추석이었다. 6ㆍ25로 가족과 친척의 생사를 모를 시절 수소문 끝에 피란지에서 만난 고모와 백부, 당숙은 추석 전날 밤 고향이야기를 안주 삼아 밤새 통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태풍은 이날 새벽 피란민들이 다닥다닥 모여 살던 부산 산복도로 판자집을 거의 다 날려버렸다. 부산이 고향인 기자의 노모는 “피란지에서의 명절 분위기가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고 당시를 회고하곤 한다.

부산은 이런 애환의 도시다. 주 배경은 6ㆍ25 피란시절, 배역은 전 국민이다. 사실 기자의 출생지가 부산인 것도 황해도가 고향인 부친(작고)이 단신으로 피란와 기숙하던 집 주인 딸을 아내로 맞았기 때문이다.

이런 DNA를 물려받은 기자에게 최근 ‘피란수도 부산’의 건축ㆍ문화자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주장은 귀가 쫑긋해질 수밖에 없다. 부산발전연구원이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1주일 만인 1950년 7월 2일 부산항 보급창 부두로 이승만 대통령 일행이 도착한 이래 부산은 장장 1,023일간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수도 기능을 했으며, ‘임시수도’의 한계는 있으나 전쟁으로 수도가 통째 이전한 사례로는 국제적으로 유일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또 최근 일본이 조선 강제 징용자를 노역시킨 자국 근대 산업유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해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우리도 원형 변형이 더 진행되기 전에 희소가치 있는 근대 도시유산을 빨리 재조명해야 한다는 절박함도 깔려있다. 보고서는 특히 100만명이 넘는 대규모 피란민을 수용한 서민포용적 문화가치, 대통령집무실(부산경무대) 등 공공기관 건물에서부터 서민경제(깡통시장)와 생활현장(판자촌)의 연대기적 건축자산 가치, 피란수도의 다양한 도시기능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독특성 등을 감안하면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유네스코의 19~20세기 문화유산 등재 사례를 보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완전 파괴됐다 재건된 프랑스 ‘르 아브르’, 남태평양 식민도시의 발전단계를 잘 보여주는 피지의 ‘레브카 항구 역사지구’ 등은 좋은 사례다. 일본은 산업국가 형성과정을 시대별로 제시한 ‘규슈ㆍ야마구치 근대 산업유산지역’을 2009년 잠재목록으로 올리는 데 성공했고 올해는 등재가 유력하다 한다. 그렇다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이자 아직 미완인 한국전쟁이 빚어낸 피란수도 부산의 문화유산은 오히려 그 이상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목상균 부산본부장 sgm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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