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 정경유착 무기로 한국을 해외수출 하청 기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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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정경유착 무기로 한국을 해외수출 하청 기지화

입력
2015.06.29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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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을 징용자로 혹사시킨 기업, 후지노 사장이 박정희와 손잡아

수출공단 조성 등 기간산업 독식… 천문학적 이익 챙기며 기사회생

서울지하철 공사 관련 정치헌금 등 日 정계에서도 '검은 유착' 추궁

강제 동원 피해자 소송 줄 잇는데 "보상 끝났다" 미쓰비시는 발뺌

일본이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추진 중인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가사키조선소. 과거 80여척의 군함이 건조된 이 조선소에는 조선인 징용자들이 대거 동원되어 혹사당했지만, 조선소 자료관은 이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당인리발전소(현 서울화력발전소) 건설, 경인선 전철화 사업, 동양최대 규모의 쌍용시멘트 공장 건설, 수출공업단지 조성, 포항종합제철소 건설, 서울지하철 사업, 대한조선공사 확장 공사, 신진자동차 기술 제공, 엘리베이터 제조 기술 제공…. 일본 대기업 미쓰비시(三菱)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박정희 정권과 손을 잡고 한국에 남긴 족적의 일부이다. 단일 기업집단이 이처럼 굵직굵직한 실적을 남길 만큼, 박정희 정권의 성공적인 산업화를 상징하는 ‘한강의 기적’에는 한국인의 피땀만이 아니라 미쓰비시를 필두로 한 일본기업의 기여도 적지 않게 들어있다. 미쓰비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을 바탕으로 한국 경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엮어나갔다.

미쓰비시 그룹의 핵심 계열사로 한국시장 개척의 선봉에 선 미쓰비시상사(商社)의 사사(社史)는 이 시기 한국과 경제협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다수의 대규모 계약을 따내 이를 이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울지하철 건설 프로젝트나 포항종합제철소 건설에 협력했는가 하면, 1974년부터는 제병(製甁)공장에 플랜트를 납입하고 식품회사에는 병 채우기 및 병 세척 기계 등을 팔았다. 한국의 비료회사에는 비료를 팔았다. 더욱이 당시 외화부족에 허덕이던 한국을 돕기 위해 우리 회사가 직접 한국 상품을 샀는가 하면, 한국 상품의 제3국 수출을 촉진하기 위한 사절단을 파견해 커다란 성과를 거뒀다.” 한국 시장에서 이윤만 챙긴 게 아니라 한국을 돕기 위해 한국 상품을 사주고 해외 진출마저 지원했다니, 웬만한 상거래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희생정신’마저 발휘된 것이다.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돌연 개과천선이라도 한 것일까. 일제는 미쓰비시의 첨단 무기로 무장한 채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를 침략했다. 태평양에선 미쓰비시가 만든 제로센 전투기와 전함을 앞세워 미국과 전면전을 벌였다. 일본 시민운동가들이 펴낸 ‘전쟁책임연구’ 자료에 따르면 미쓰비시 그룹은 일본의 전범기업 가운데 가장 많은 10만여 명의 조선인 징용자를 데려다 혹사시켰다. 징용 피해자들은 3개의 마름모로 이뤄진 미쓰비시의 깃발이 휘날리던 나가사키(長崎)조선소나 하시마(端島) 해저탄광 등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 무수히 죽어갔다. 전쟁 말기에는 수천 명의 10대 초중반 미성년 여성들마저 ‘근로정신대’라는 희한한 이름으로 끌려와 미쓰비시의 군수공장에서 각종 무기 제작에 동원됐다. 더욱이 미군이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에 소재한 미쓰비시의 군수공장들을 핵심 타깃으로 삼아 잇달아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수많은 징용자들이 희생됐거나 이후에도 심각한 후유증을 앓았다. 이런 미쓰비시가 일본 패전 후 ‘전범’으로 간주돼 해체됐던가 싶더니 이후 슬그머니 재결합해 한국 시장에 화려하게 다시 등장한 것이다.

미쓰비시가 한국에 재진출하고 한국의 국가사업을 거의 독점하게 된 계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후지노 쥬지로(藤野忠次郞) 미쓰비시상사 사장과의 개인적 유대관계에서 출발한다. 후지노는 수시로 박 대통령과 만나 한국의 산업화 전략에 대해 조언하면서 적극적으로 관련 프로젝트를 챙겼다. 미쓰비시와 군사정부 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 인물은 신문기자 출신인 박제욱(전 영진흥산 사장)으로, 그는 김재춘 이후락 등 정권 핵심세력과 가까웠다. 박제욱의 회고를 토대로 한 자료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과 후지노는 한일협정 체결 4개월 전인 1965년 2월 청와대에서 처음 만났다.

“김포공항에 내려 보니 컴컴했습니다. 불을 밝히지 않으면 국민들이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미쓰비시는 앞으로 한국의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중공업 입국(立國)을 위해 어떠한 협력도 불사할 각오가 돼 있습니다”(후지노). “지금 한국은 돈도, 시장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후지이씨와 같이 청렴하고 경륜이 있는 분이 지도해 주면 좋겠습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재학 중일 때 미쓰비시중공업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만든 군함과 잠수함을 보고 감동했습니다”(박정희). 이렇게 둘은 의기투합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국 지도를 펼쳐놓고 고속도로, 발전소 건설 등 국가 개조 계획을 설명하면서 미쓰비시의 지원을 호소했다. 이에 대해 후지노는 “미쓰비시는 앞으로 박 대통령과만 상의하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이후 후지노는 박 전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 통화가 가능할 정도의 관계를 만들어갔다고 한다.

미쓰비시의 한국 진출은 거침이 없었다. 1967년 미쓰비시은행(현 미쓰비시도쿄UFJ은행)이 일본의 은행 가운데 가장 먼저 서울에 지점 개설을 허가 받았을 뿐 아니라 한국 정부가 추진한 대형 프로젝트를 독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독차지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업이 포항제철 건설 사업이다. 박 전 대통령은 1968년 2월9일 일본 제철소들의 지원을 간곡히 요청했고, 후지노는 미쓰비시 그룹 내에서조차 반대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 제철업계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로써 미쓰비시상사는 일본 정부의 차관이 대거 투입된 포항제철 건설사업의 간사(幹事)회사로서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 재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물론 일본의 전쟁 기간에도 무기를 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전후에도 뉘우치기는커녕 문어발식 확장을 거듭해온 미쓰비시가 순수하게 한국의 산업화에 기여하기 위해 박 전 대통령과 손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미쓰비시상사 출신으로 일본 참의원 국회의원을 역임한 야기 다이스케(八木大介)의 회고에 따르면 미쓰비시는 최대 장점인 중화학 관련 계열사를 앞세워 한국의 산업을 하청업체 혹은 가공 기지로 육성한다는 전략적 구상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미쓰비시는 3국간 무역의 수단으로서, 특히 대미 수출의 하청 기지로서 한국을 활용한 것이다. 이는 좋게 말하면 한국이라는 국가와 미쓰비시라는 일개 기업 간의 상호의존관계의 형성이며, 나쁘게 말하면 미쓰비시 그룹 산하에 한국의 주요 산업이 수직적으로 계열화되는 황당한 관계가 구축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미쓰비시의 사업구상은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전략과 맞물려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미쓰비시상사의 거래량은 1963년 1조엔 대였으나 67년 2조엔, 69년 3조엔, 70년에는 4조엔을 각각 돌파했다. 이는 1960년대 일본의 평균 경제성장률 10%와 비교하더라도 거의 2~3배나 높은 것으로, 일본의 대형 상사 중에서도 압도적인 성장세였다. 더욱이 미쓰비시는 이후에도 한국에 투입한 자본재와 기술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상호의존’을 통한 이익 확장을 도모할 수 있었다.

미쓰비시와 한국 간의 ‘독점적’ 관계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후지노 미쓰비시상사 사장 간의 ‘의기투합’만으로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여기에도 어김없이 ‘검은’ 뒷거래가 활개를 쳤다. 1965년 한일협정 이전부터 미쓰비시는 군사정부에 정치자금을 제공해 왔다. 사실상 미쓰비시의 한국 대리인 역할을 해온 박제욱은 “1963년 대선을 앞두고 미쓰비시로부터 100만달러를 빌려 대선자금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서 박제욱이 ‘빌렸다’고 말한 것은 몇 년 뒤 당인리발전소 프로젝트를 미쓰비시에 주는 형식으로 갚았기 때문이었다. 1963년 10월에야 ‘민정이양’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군복을 벗고 직접 대통령이 되기 위해 선거에 나선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는 46.6%를 획득, 45.1%를 얻은 윤보선(민정당) 후보에게 15만여 표(1.5%)라는 그야말로 박빙의 차이로 승리했다.

일본 정계에서도 미쓰비시와 박정희 정권과의 ‘검은’ 유착이 추궁될 될 정도였다. 가령 1977년 12월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는 미쓰비시상사가 서울지하철 건설공사와 관련해 한국 정계에 제공한 정치헌금이 논란이 됐다. 미쓰비시상사를 창구로 한 ‘일본 연합’은 1973~74년 총액 185억엔 규모의 서울지하철 공사를 수주했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 내 한국기업의 예금구좌에 상당액의 리베이트가 송금됐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당시 참고인으로 출두한 미쓰비시상사의 다나베 분이치로(田部文一郞) 사장은 ‘특별한 중개료’가 존재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총사업비의 7~8%가 리베이트였는데, 현지 대리점의 중개수수료인 2%를 제외한 5~6%는 한국 정치권 등에 ‘윤활유’로서 흘러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과 미쓰비시가 만든 한일 경제협력의 ‘신화’의 이면에는 이렇게 시커먼 정경 유착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일제의 태평양전쟁기에 주로 미쓰비시의 군수공장 등에 동원된 10대 초중반의 여성 근로정신대. 美 국립문서기록청 제공

2015년 5월 우리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미쓰비시중공업 등에 동원된 피해자들이 이들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상고심에서 1965년 ‘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강제징용 문제를 포함한 ‘식민지 지배 책임 일반’이 해결되지 않았다고 적시하고, ‘배상’ 판결 취지로 항소심 재판부로 되돌린 바 있다. 이후 미쓰비시를 상대로 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러나 미쓰비시 측은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보상이 끝났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소장을 반송하는 등 다분히 의도적으로 소송을 기피하고 있다.

여기서 오히려 심각하게 추궁해야 할 것은 대법원 판결을 수용해 정부 차원의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할 것인지, 아니면 포기할 것인지 입을 닫은 한국 정부의 태도이다. 한국 정부의 ‘직무유기’가 미쓰비시의 ‘나쁜 용기’를 부추긴다는 피해자 측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언제까지든 깔아뭉갤 수 없는 사안이며, 더욱이 한국 정부가 침묵한다고 과거의 어두운 유착관계가 없던 일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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