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처럼 손가락 사용은 안 해
디지털 기기 전광판으로 진행
"한중 FTA로 더 밀려올텐데
토종 배추 지킴이 역할 해야죠"
지난 26일 오후 10시30분,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시장에서 채소 경매가 시작됐다. 각 지방에서 배추와 무, 대파, 양파 등을 가득 싣고 올라온 트럭들이 축구장 두 개 크기의 경매장에 속속 모여 들었다. 트럭들이 짐을 내려 놓기 무섭게 지게차들이 연신 시끄러운 경고음을 울리며 창고로 채소를 실어 날랐다.
이 풍경을 경매장 한 켠에 가건물처럼 만든 2층 컨테이너 박스 사무실에서 오현석(48) 대아청과 경매사가 창 너머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그래도 다행이네요. 배추 트럭이 10대라도 들어왔으니.”
오씨는 이 곳에서만 25년을 보낸 베테랑 배추 경매사다. 그런데 요즘처럼 배추 물량이 부족한 적은 흔치 않았다. 기나긴 가뭄에 배추 공급이 쉽지 않다. 그 바람에 금요일 경매는 보통 트럭 15대 물량이 쏟아지는데 이날은 전날 내린 비까지 겹쳐 배추를 뽑지 못하면서 적은 물량이 올라 왔다.
오씨는 경매 시간인 오후 11시가 다가오자 서둘러 배추를 점검했다. 그가 다람쥐처럼 배추 트럭에 올라 배추를 살피는 데 걸린 시간은 차량당 30초 남짓이었다. “경매에 앞서 벌레가 먹지 않았는 지, 무르지 않았는 지 배추 상태를 살펴 적정 등급을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 것으로 배추를 구입하는 도매상인들이나 배추 산지 농민들이 경매사의 능력을 평가하죠.”
경매 과정은 전쟁이나 다름없다. 적은 비용으로 많은 물량을 구매하려는 도매상인들과 배추 산지 농민들에게 수수료를 받은 경매사가 가격을 놓고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이는 보이지 않는 눈의 전쟁이다.
가격 싸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형태는 달라졌다. 더 이상 경매사들이 손가락을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은 경매도 디지털 방식으로 바뀌어서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하는 수지식 경매를 하지 않아요.”
수지식 경매 시절에는 말이 많았다. 동시에 같은 가격을 써낸 경우 경매사가 먼저 써냈다고 지정한 낙찰자가 물량을 가져갔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손가락 신호 대신 경매를 위해 수량과 단가 및 낙찰자 등이 표시된 전광판과 디지털 기기를 사용한다. 도매상인들이 스마트폰 크기의 디지털 경매기기로 희망 물량과 낙찰 가격을 써내면 소형 트럭을 개조한 경매 차량 전광판에 표시된다.
10여분 만에 배추 경매를 마치고 내려온 오씨는 “요즘 가장 무서운 적은 가뭄이 아닌 중국산 저가 김치”라며 한숨을 쉬었다. “가뭄은 비가 오면 해결되죠. 중국산 저가 김치는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중국산 김치는 국산에 비해 3분의 1 가격에 거래된다. 현재 이 곳에서 국산 배추는 1포기에 2,300원에 거래되고 있다. “요즘은 중국산 김치가 예전과 달리 맛도 좋아서 품질 경쟁력에서도 토종 김치에 뒤지지 않아요.” 오씨는 “그 바람에 지방에 있는 상당수의 음식점들은 중국산 김치에 점령당한 상태”라고 귀뜸한다.
그만큼 토종 배추와 25년을 함께 한 오씨의 어깨가 무겁다. “이제 한국과 중국 사이의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 관세 인하로 중국산 김치가 더 많이 밀려들어 올겁니다. 꿋꿋하게 토종 배추가 살아 남아서 계속 경매장에 나왔으면 좋겠네요”
허재경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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