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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희망은 멀리 있지 않다

입력
2015.06.2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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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쉬운지 모르겠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더는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미 이 세계를 향한 신뢰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세월호 참사 이후 어느 작가가 일깨워준 대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희망 없음을 이야기하기가 쉬워진 세상이다.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메르스를 가래로도 막지 못한 정부나 의료기관을 보든, 세월호 사건을 겪고도 크게 변하지 않은 한국사회를 보든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하달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사회의 질서 속에 내 자리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라면 과연 내게 국가가 있는지 의문을 품어 마땅한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국가도 공동체도 더 이상 의미 없다, 세상은 이미 망했거나 곧 망할 것이다 라는 말을 던지는 사람들 다수는 사회 내에서 자신의 지위와 자격을 의심받은 경험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특히 지식인들 가운데는 대안적 상상을 특출한 사람의 머리에서나 나올 수 있는 남다르고 기발한 생각에서 찾는 경우가 많지만, 실은 이렇게 사변적인 대안에 만족하거나 절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들이 가진 특권적 지위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반면 국가의 보호 바깥에 놓인 사람들일수록 오히려 공공성을 담보하는 국가나 나의 존재를 포함하는 사회가 절실하기에 공동체에 대한 믿음 역시 쉽게 포기하기 어려워한다.

그런데 국가의 보호 바깥에 있는 사람이 애초부터 따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병원 직원인 건 분명하지만 정규직이 아니니 직원 대상 메르스 감염 추적 관리 때도 안중에서 벗어났던 것일 테고, 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집을 떠나 사는 많은 청소년들 역시 존재하지만 파악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존재감이 없어 사회의 관심이 되지 못하면 통계가 없고, 통계가 없으니 정책의 근거가 없어지는데, 딱히 지원도 없으니 존재를 입증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이 악순환은 한국 사회에 이미 자리 잡고 살아가는 어떤 이들의 존재를 지우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미국연방대법원이 동성결혼을 미국 전역에서 인정한다고 판결한 것은 그런 점에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 판결이 중요한 것은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을 인정하면서 국가가 보호할 대상에 그들을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결혼제도에 기반을 둔 가족이 절대적인 단위가 되는 세계에서 배우자로 인정 받지 못한다는 것은, 재산을 증여ㆍ상속할 때, 세금공제나 동반이주를 할 때, 그리고 의료적 처치에 필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도 이미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을 법적 보호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었다는 것을 법이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법이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평가하고, 현실을 법에 반영하도록 노력한 많은 사람들 덕분이다.

물론 법이 한번 개정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일 수는 없을 것이다. 결혼제도 자체에 부정적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동성결혼에 포함되기 어려운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세상에는 무엇보다 결혼에 관한 법률로 담아낼 수 없는 많은 배제와 불평등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번 미국의 판결은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바뀌는 데 따라 세상의 규칙도 변화한다는 믿음을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한국법이 변한 것도 아닌데 동성결혼의 당사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이번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지지를 표시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세상이 바뀌기도 한다는 것을 믿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희망을 멀리서 찾을 때 현실을 넘어설 힘은 나오기 어렵다. 새로운 질서란 기실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자리를 마련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희망을 갖기란 쉬운 일은 아닐지언정 실마리 없이 막막한 일도 아닐 것이다.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 교수ㆍ문화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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