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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순탁] 'LP 전성시대'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입력
2015.06.28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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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내 작은 서랍을 열면 그 속엔 카세트테이프가 가득했다. 최초로 내가 구입했던 팝은 마이클 잭슨의 ‘Bad’(1987), 가요는 봄여름가을겨울의 2장짜리 ‘Live’(1991)였다는 게 기억난다. 팝이 먼저였고, 가요가 그 다음에 온 셈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카세트테이프를 모으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시절부터였다. 당연히 워크맨은 필수품이었고, 그 중에서도 ‘오토 리버스’ 워크맨이 가장 핫했다.

당시 ‘오토 리버스’ 워크맨은 뭐랄까, 일종의 부의 상징이었다. 브랜드도 중요했다. ‘마이마이’보다는 ‘파나소닉’이, ‘파나소닉’보다는 ‘소니’가 속된 말로 좀 더 먹어줬다. 소니 것의 가격은 대략 15만원대. 무엇보다 테이프를 꺼내지 않아도 저절로 B면이 플레이된다니, 인류 역사에 가장 큰 혁명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거라고 18살의 나는 확신했다. 대략 1994년 즈음의 일이었다.

이후 대학시절에는 당연히 CD를 모았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으니, 평균 2개의 알바를 뛰었고, 이를 통해 얻은 수입을 학비와 CD 사는데 다 써버렸다. 일주일에 구입했던 CD는 3개에서 5개. 지금은 사라진 홍익대학교 정문 앞 퍼플 레코드에서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수백장의 CD를 샀다. 어느새 만장이 훌쩍 넘어버린 CD들, 그 뒤로는 귀찮아서 장수도 세지 않고 있다. 가끔씩 꺼내 듣고, 때때로 감동 받는다.

나는 방금 ‘가끔씩’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유인즉슨, 이제는 더 이상 CD를 ‘자주’ 구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몇 년 전부터 오로지 바이닐(Vinyl), 즉 LP만을 컬렉션하고 있다. CD로 사는 것은 LP로 나오지 않는 앨범들뿐이다. CD보다 훨씬 무거운 LP는 계속해서 늘어만 가고, 여기에 책, 만화책, CD까지. 이번 생에 이사하기는 아무래도 글렀다. 여기에서 쭉 살다가 죽을 팔자인 모양이다.

LP가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LP가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른바 LP 전성시대(라고들 말한)다. 지난 주말 서울에서는 레코드 페어라는 행사가 열렸다. 매년마다 개최되는 레코드 페어는 간단하게 음반을 대규모로 파는, 음악 마니아들을 위한 축제다. 이곳에서는 판매자와 구매자들이 뒤섞여 CD와 LP를 놓고 흥정하는 모습을 만날 수 있는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LP의 세일즈가 해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소비하듯 감상하는’ 시대에 LP라니,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성(物性)으로서의 음악을 담아내는 매체의 주도권이 CD에서 LP로 넘어가고 있는 건, 전세계적인 추세에 속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뭐랄까. 물성에 대한 갈구라고나 할까. 나는 LP를 음악을 듣기 위해서도 사지만, 그것을 ‘만지기’ 위해서도 산다. LP 자체가 주는 독특한 질감을 내 손을 이용해 직접 만지고 느껴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책으로 치자면 나는 독서가인 동시에 애서가인 셈이다.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의 질감까지도 사랑하는 사람 말이다. 게다가 요즘 LP에는 MP3 파일도 다운로드할 수 있는 쿠폰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가격이 좀 비싸긴 하지만 이거 뭐,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지난주에는 스매싱 펌킨스(The Smashing Pumpkins)의 걸작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1995)와 한국 록 밴드 노이즈가든(Noizegarden)의 데뷔작 ‘Noizegarden’(1996), 아이슬랜드의 보물이라 불리는 시겨 로스(Sigur Ros)의 1집 ‘Ágætis byrjun’(1999)과 2집 ‘( )’(2002), 최근 흥하고 있는 영국 출신 뮤지션 제이미 엑스엑스(Jamie XX)의 ‘In Colour’(2015) 등을 LP로 샀다. 아마도 누군가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이 앨범들을 ‘LP 특유의 따스한 사운드’를 누리기 위해 산 거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인간의 귀는 그렇게 정확하지 않다. 수많은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CD가 아닌 MP3가 더 음질이 좋다고 착각한 경우들, 믿기지 않겠지만 수두룩하다. 그런데 LP의 소리가 CD보다 더 인간적이다?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이건 말 그대로 미신에 가깝다. 차라리 나처럼 페이스북에 자랑질하기 위해 LP를 산다고 말하는 게 더 솔직한 태도일 거라고 믿는다. 오늘도 페친들의 좋아요 개수는 눈에 띄게 증가하고, 그러는 만큼 왠지 나는 뿌듯해진다.

결국엔 ‘소비라는 형식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봐야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그러니까, 단순한 소비 아닌 ‘취향에 기반한 소비’에는 묘한 위로/위안의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머리가 복잡하거나 마음이 허전할 때 LP를 사는 습관이 있다. 그러다보면 비단 LP를 꺼내 음악을 듣지 않아도, 어느새 그 행위 자체에 위로/위안을 받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한다. 이런 소비, 이런 취미, 당신에게는 있는가? ‘오늘 (음악) 뭐 듣지?’라고 고민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욱 중요한 것, 그건 바로 ‘오늘 (음악을 듣기 위해) 뭐 사지?’일지도 모른다.

음악평론가·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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