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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양자 제록스 불가원리와 표절

입력
2015.06.28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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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이하의 미시세계는 양자역학이 지배한다. 전자 같은 소립자의 위치를 측정하면 측정하는 행위 자체가 전자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속도를 정확하게 잴 수 없다. 이것이 그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이다. 만약에 엄청난 성능의 제록스 복사기가 있어서 전자의 양자역학적 상태를 그대로 베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전자의 원본 상태에서 위치를 측정하고 복사본 상태에서 속도를 측정한다면 천하의 불확정성 원리를 가뿐히 무너뜨릴 수 있다. 과학자들은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우리 우주에서 그런 고성능의 양자 제록스는 불가능하리라 여긴다. 이것을 양자 제록스 불가원리 또는 복제 불가능 정리라고 부른다.

얼마 전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시비가 터졌을 때 나는 양자 제록스 불가원리를 떠올렸다. 미시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가 인간 세상에도 그대로 작동했다면 표절이라는 단어가 아예 없었을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유시민 전 장관의 해석이 흥미로웠다. 신경숙이 젊은 시절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필사를 많이 해서 이게 내 문장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얘기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노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표절에 노출될 위험은 더 커지는 모양이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 대한민국이 적어도 1970년대로 후퇴했다는 소리가 많이 들린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내 생각엔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필사’를 (자의든 타의든)너무 많이 한 탓이 아닐까 싶다. 독재자는 사과나 반성 따위는 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초월적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메르스 등 국가적 재난이 닥칠 때마다 뒤늦게 호통만 치는 대통령의 모습은 적어도 21세기가 요구하는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다.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에 대한 집착이 자칫 과도한 ‘유신 필사’로 이어져 지금이 70년대인지 21세기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진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정치에서야 물론 좋은 정책이라면 ‘표절’을 장려라도 해야 할 터, 아마도 지난 대선 때 많은 국민들은 박근혜 후보에게 ‘박정희식 개발 표절’을 기대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때 외신들이 ‘독재자의 딸’이라는 타이틀을 뽑은 건, 어쩔 수 없이 독재자를 필사할 수밖에 없는 딸의 처지를 경고한 게 아니었을까? 불행하게도 인간 세상에는 ‘독재 제록스 불가원리’ 같은 게 없다.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표절 논란에 대한 신경숙의 해명이다. 독재는 아예 자신의 기억을 믿을 필요조차 없다. 최근 국회법을 거부한 박 대통령은 야당 시절 이와 비슷한 개정안에 서명한 적이 있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국가가 아니라고 당시 정부를 비판한지 10년 만에 세월호 참사를 맞았다. 부디 지금 대통령은 본인의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아니 믿을 필요가 없는 상황이 아니길 바란다.

이종필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BK사업단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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