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문화축제의 상징 퍼레이드, 평화롭게 마무리되는 게 중요
20여년 전 뉴욕서 처음엔 폭력 얼룩… 지금은 대기업ㆍ은행서 행사 지원
정부 성향따라 성소수자 부침 겪어… 결국 점진적으로 인권 보장될 것

한국에서 태어나 생후 8개월 만에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계 미국인. 동시에 스스로를 “남성의 몸을 한 여성”으로 정의한 트랜스젠더. 성소수자 인권활동가 폴린 박(55)을 관통하는 두 줄기 정체성이다. 쌍둥이 형제와 함께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백인 마을로 입양된 박씨는 노르웨이계 미국인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했다. 동양인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그곳에서 박씨에게는 늘 ‘가짜 한국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게다가 그는 이미 네 살 무렵 자신의 성 정체성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지했다. 그러나 그가 살던 곳은 보수 기독교 성향의 독일 루터파 교세가 강했던 곳이었다. 성 정체성을 드러내기가 불가능했다. 35살에 뉴욕으로 온 그는 오랜 고민 끝에 2년 뒤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했다. 그 무렵 그는 뉴욕주 최초의 트랜스젠더 조직인 뉴욕젠더권리지원협회(NYAGRA)를 설립해 본격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 나섰다. 4년 뒤 뉴욕주 지방법에 트랜스젠더 차별금지 조항이 신설된 것은 그 결실이었다.
세계 성소수자들과 연대 중인 그는 지난 17일 한국을 방문했다. 국내 성소수자인권단체들이 초청한 이번 방한은 인권활동과 더불어 그의 뿌리를 찾기 위한 여정이기도 하다. 28일 서울에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를 앞두고 그를 서울 시내 호텔에서 인터뷰했다.
-한국을 방문한 소감은.
“혈육을 찾아보겠다는 생각에 한국에 도착한 뒤 대한사회복지회를 통해 친부모의 기록을 수소문했지만 워낙 시간이 많이 흘러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설사 찾는다 해도 트랜스젠더 미국인인 나를 한국의 가족이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아쉬움이 더 크다. 대신 서울을 비롯해 경주, 포항 등 도시를 방문하고 문화 유적지를 눈으로 보면서 마음을 달랬다. 핏줄에 대한 정체성 고민에 많은 도움이 됐다.”
-지난 9일 시작한 퀴어문화축제가 개막 전부터 비난 여론에 부닥쳤고 축제 핵심 일정인 퍼레이드는 당국의 허가조차 받지 못했다.
“퍼레이드 날 한국의 성소수자 운동가들 앞에서 연설을 맡게 됐다. 모국에서 열리는 뜻 깊은 행사에 초청받을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함께 거리를 행진하겠지만 충돌이나 폭력에는 반대한다. 행진이 평화롭게 마무리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행진은 그 자체로 사람들 주목을 끄는 상징적인 행위다. 언론의 주목을 받을 가능성도 크기 때문에 성소수자 이슈를 알리는데 효율적이다. 성소수자들은 행진을 통해 친구, 이웃들과 소통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20여년 전 뉴욕도 한국과 상황이 비슷했다. 당시 행진은 동성애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주최측 간 충돌, 폭력으로 얼룩졌고 거리는 분노로 가득 찼다. 그럼에도 활동가들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은 뉴욕의 성소수자 퍼레이드를 두고 누구도 막아서지 않는다. 나아가 미국의 대기업, 은행들이 퍼레이드를 비롯한 여러 행사를 지원한다. 멈추지 않고 꿋꿋이 걸어온 결과다.”

-한국에서 성소수자 인권이 후퇴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올해 국내 성소수자단체가 발표한 ‘한국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인권 현황’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성소수자 인권 지수는 2013년 15%에서 지난해 12%로 하락했다.
“한국은 정부 성향에 따라 성소수자 인권이 부각되거나 폄하됐다. 최근 보수정권이 집권한 뒤로는 한국의 성소수자들이 “더 이상 청와대에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 듣기도 했다. 한국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오랜 기간 유교사회였다. 근대에는 군사독재정부가 집권한 보수적인 국가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짧은 시간 동안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일구며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변화를 이끌어 냈다.
오늘날 한국인의 시민ㆍ민주의식 수준은 높은 편이다.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다만 미국이 그랬듯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인권 보장이 될 것이다. 20여년 전만 해도 하리수씨가 방송에 나오고 동성애를 주제로 한 대중영화가 나올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한국의 성소수자 이슈는 보수-기독교 세력과 상당 부분 결부면서 갈등을 키워왔다. 기독교 국가인 미국과 비교할 때 어떤가.
“미국에도 분명 동성애를 혐오하는 근본주의 세력이 존재한다. 다만 미국에는 교회 종파가 다양하고,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동성애를 지지하는 교회도 있다. 내가 다니는 교회도 동성애에 관대하다. 기독교 중에서도 보수적인 가톨릭의 경우 2년 전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동성애에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면서 많은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한국도 일부 기독교 신자들이 성소수자를 혐오세력으로 규정하고 반대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성소수자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들을 사회 구성원으로도 인정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동성애자들은 기독교인이 한반도에 발을 딛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동성애 역사가 깊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역사적으로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에는 화장을 즐겨 했던 화랑도를 통해 남색(男色)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후기 장터와 마을을 돌아 다니며 춤과 노래, 곡예를 했던 남사당패에서도 배우 간 동성애가 있었으며, 무속신앙인 굿에서 박수무당도 동성애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에서 성소수자들은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이웃으로 함께해 왔다. 그들은 어느 날 우주에서 떨어진 외계인이 아니다. 서양에서 건너온 기독교인들보다 더 한국적인 사람들일 수 있다.”
-향후 계획은.
“3년 전 성소수자들이 명예살해 당하는 등 인권 탄압이 극심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방문해 인권 활동을 한 적이 있다. 앞으로도 전세계 국가들을 방문하면서 연대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인터뷰, 저술활동, 문화 활동 등 다양한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장재진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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