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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안전이별

입력
2015.06.2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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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 동안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는 여성들의 고백이 연일 이어졌다. 그녀들은 데이트 폭력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페미니스트도 맞을 수 있으며, 진보를 지향하는 이도 때릴 수 있다는 것을. SNS 상에서는 폭력을 휘두른 이에 대한 비판 사이로 반복적인 폭행을 당하면서도 왜 진작 헤어지지 않았냐며 의구심을 내비치는 이들도 보였다. 매사에 똑 부러지고 마땅히 할 말을 잘 해서 드세다는 비난을 듣는 페미니스트들이 왜 때리는 남자를 떠나지 못했을까.

몇 년 전 여행 길에서 만난 친구가 있다. 나보다 열 살쯤 어린 친구였는데 일주일쯤 함께 다녔다. 밝고 건강한 데다 총명해서 어두운 과거를 상상할 수 없는 친구였다. 어느 아침, 그녀가 핸드폰을 내밀며 내게 고백했다. 여행 전에 잠시 만났다 헤어진 남자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다고. 밤사이 수십 개의 카톡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나를 모욕한 네가 여행을 무사히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미 네가 여행하는 나라의 내 지인들에게 다 알렸다. 한국에 돌아오면 너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겠다. 이런 식의 협박이 몇 달째 계속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말 죽여버리겠다고까지 했단다. 이건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범죄라고 하니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경찰은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다면서. 몇 년 전 회사 동료와 연애를 할 때도 그녀는 지속적으로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 모텔 방에 갇혀서 목이 졸리고, 도망치다가 잡혀서 침대 위로 내던져지고, 차 안에 갇힌 상태로 폭력적인 운전과 협박을 견뎌야 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그녀는 울면서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 증거가 없으니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는 경찰의 대답이 나는 믿기지 않았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진단서를 손에 들고 경찰서로 기어들어가야 도와줄 수 있을까.

데이트 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이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 건 목숨을 무릅써야 할 만큼 이별이 위험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전 이별”이라는 단어를 나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안전 귀가나 안전 운전도 아니고, 안전 이별을 기원해야 한다니. 사랑의 탈을 쓴 폭력이 이토록 흔했다는 게 참담했다.

그 친구를 괴롭힌 두 청년은 사회적 기준에서 본다면 꽤 잘난 남자들이었다. 똑똑하다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면 뭐하나. 사랑을 핑계로 사람을 공포로 몰아넣는다면, 끝이 난 연애의 뒷감당조차 해내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제대로 사랑할 줄도, 제대로 헤어질 줄도 모르는 반푼이다. 여성을 힘으로 위협하는 범죄자에 불과하다.

그 남자들에게 ‘안전이별’이 불가능한 건 자신의 좌절감과 분노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지나친 기대와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감정도 사람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걸 잊어버리는 순간, 사랑은 범죄가 되기도 한다. 상대를 해치거나 나를 해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되기 쉽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 이 문제를 놓고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사랑은 내 인격보다 더 고매할 수 없다” 사랑의 방식은 결국 인격의 수준을 넘을 수 없다는 거다. 내가 욱하는 성격이면 내 사랑도 욱할 수밖에 없다. 내가 비겁한 사람이라면 내 사랑도 비겁해지기 쉽다. 한 나라의 정치인 수준이 결국 그 나라 국민들 수준인 것과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아름다워야 한다. 동시에 상대방이 내 사랑이 없이도 이미 아름다운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공자님 말씀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게끔 하는 것이다. 모든 관계의 전제 조건은 상대의 인권을 무조건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이벤트를 준비하고 기념일을 챙기기 전에 내 사랑이 상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지부터 돌아보자. 자가격리를 해서라도.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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