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두루 빈한하던 시절의 일이다. 터덜터덜 길을 걷다가 양복 대리점을 마주친 적 있다. 문득 양복을 입어본 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기처분 직전의 구식 양복이 한 벌 있지만, 다시 꺼내 입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진열창에 걸린 검은색 슈트가 눈에 쏙 박혔다. 무턱대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바로 구매라도 할 것처럼 입어보았다. 전시용으로 세팅된 넥타이와 구두까지 끄집어내 제대로 성장하고는 거울을 봤다. 낯선 신사(?) 한 명이 우쭐대며 폼을 잡고 있었다. 우리 아들 쫙 빼입으니 훨씬 미남이네, 어쩌구 하는 어머니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왠지 이렇게 차려입고 다니면 그 무렵 마음을 짓누르던 여러 고민들에게서 탈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점원에게 가격을 물어보았다. 구매할 생각조차 없었음에도, 가슴 뜨끔해지는 가격이었다. 필사의 연기력을 발휘해 무심한 척 했다. 공연히 작은 소리로 솔기가 어쩌구 하는 추임새까지 넣었다. 그러곤 후다닥 가게를 뛰쳐나왔다.
괜히 웃음이 났으나 씁쓸하거나 텁텁한 맛은 아니었다. 뭔가 잘했다는 기분마저 들었는데, 그 이유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점원을 약 올릴 의도도, 자조할 마음도 없었다. 다만, 가끔 이래보면 사는 게 덜 팍팍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여러모로 신산스런 요즘, 빈 지갑 들고 양복점이나 순례해보면 어떨까 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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