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레이먼 김] ‘참 매력 없는 술’ 소주에 대한 로망

입력
2015.06.25 11:00
0 0

“레이먼 셰프는 무슨 술 좋아하세요?”

내 직업이 요리사라는 걸 아는 사람들도 내가 무슨 술을 좋아하는지 묻는다. 뭇 요리사들과 달리 사람들이 나를 보면 와인이나 위스키를 연상하기는 힘든가 보다. 하긴 내가 어디 가서 최고급 프랑스산 와인인 1982년산 샤토 르 팽(Chateau Le Pin)의 ‘짙은 루비색’과 ‘미묘하게 섞인 모카와 에스프레소 향’을 얘기하거나, 세계의 명주로 꼽히는 싱글 몰트 위스키인 글렌모렌지(Glenmorange)의 복잡한 맛을 표현하는 건 안 어울리긴 하다.

그래도 명색이 20년 차 요리사로서 예전엔 페어링(와인과 음식을 매치시키는 일)에 관심이 많았고, 와인과 위스키 수업도 받았던 터라 내 가게에서 맞는 주류를 골라 팔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소위 말하는 품위 있는 술. 물론 소주보다 더 매력이 있긴 하다.
소위 말하는 품위 있는 술. 물론 소주보다 더 매력이 있긴 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사람들의 질문에 답을 하자면 나는 소주가 좋다.

사실 서양 요리에서 소주는 ‘참 매력 없는’ 술이다. 특별한 향이나 맛, 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요리에 쓰기엔 도수도 낮다. 꼭 한 군데 쓰임이 있는 곳이 있다. 주방에서 청소용으로 쓰면 참 좋다. 어떤 청소용 세정제도 1,500원에 1년 내내 시간 구애 받지 않고 가까운 편의점에서 구하기는 쉽지 않으니 말이다.

서양에서 요리를 배운 내가 서양 요리를 할 때 이렇게 ‘쓰잘 데 없는’ 소주를 좋아하게 된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요즘 청년들 중에 투명한 직사각형 병에 두꺼비가 그려져 있던 ‘관광소주’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타국에서 돈 없던 신출내기 요리사 생활을 하던 내게 가끔씩 한국식당에서 마셨던 그 관광소주는 로망이었다. 지금의 초록색 병 소주보다 양은 약간 많았지만 그래 봐야 한 병에 열두 잔 이상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가격은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8배 정도 비쌌다. 비싼 만큼 귀한 술이었다. 캐나다에 살던 한국인들 중엔 연인과의 특별한 기념일에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는 이들도 심심찮게 있었다.

17년 캐나다 생활 중 한국에 네 번 들어왔다. 그 때마다 양주나 맥주를 마시러 가자는 친구들을 이끌고 소주를 마시러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캐나다에서 봤던 한국 드라마에서 종종 봤던 ‘포장마차에서 깡소주 마시기’와 ‘한강 공원에서 소주 마시다가 하늘에 뿜기’ 등은 이상할 만큼 뇌리에 깊이 남았다.

내가 소주를 좋아하는 건 비단 어린 시절의 로망이나 추억 때문만은 아니다. 너무 ‘국제시장’ 같은 얘기일지 모르지만 1,500원이면 살 수 있는 이 흔한 술은 1960~70년대 맨주먹으로 어려운 길을 닦았던 우리네 아버지들의 퇴근길 동무였고, 1970~80년대 피끓던 청춘들이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권력에 맞서 싸워가며 마셨던 술이다. 또 중동 사막이며 독일 탄광, 인도차이나의 정글까지 돈을 벌기 위해 이국만리까지 갔던 노동자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함께 떠올렸을 술이다.

8~9년쯤 전으로 기억한다.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청담동의 근사한 레스토랑 오너 요리사에게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그 요리사는 와인과 위스키를 차린 자리에서 “소주를 왜 마시냐”고 했다. 그의 요지는 ‘전통 증류주도 아닌 희석식 화학주를 가장 좋아하는 술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좀 이상하다. 언젠가 내가 지금 소주가 누리고 있는 자리에 와인이나 위스키 같은, 정 안되면 문배주나 이강주 같은 품위 있는 술을 올려놓겠다. 소주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소주 마실 상황밖에 안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그래도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생각을 갖고 사는 게 서울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해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다. 그 ‘근사한 레스토랑’이 있던 자리엔 소주집이 생겼고, ‘소주를 왜 마시냐’던 그 요리사는 수도권 언저리에서 소주와 맥주를 파는 ‘퓨전’식당을 차려 꽤나 성공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요즘엔 여러 가지 맛의 소주가 나온다. 내 아내는 도수가 낮고 맛과 향이 들어간 ‘그 소주’를 좋아한다. 나는 그냥 소주가 더 좋다. 오늘은 이 글을 썼다는 핑계로 아내가 만들어주는 삼치구이와 달걀 말이에 각자 다른 소주를 한 병씩 놓고 ‘스타워즈’나 한편 봐야겠다.

요리사

레이먼 김 '포스트 Eat' ▶ 시리즈 보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