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사회는 어느 한 군데 성한 곳이 없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으로 국민들은 난데없는 감옥 체험을 하고 있다. 예정되었던 굵직한 행사들이 모두 취소되는가 하면 외국인 감소로 관광특구의 상점 매출은 바닥 없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메르스 때문이 아니고 굶어서 죽게 생겼다는 상인들 하소연은 헛말이 아니다. 이토록 국민의 삶을 초토화 시킨 메르스가 이미 2년 전에 경고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를 우울하게 한다.
가뭄도 큰 문제다. 다목적 용도로 만들어진 소양강댐의 수위가 발전 중단 수준인 150m에 가까워졌다. 전국 각지에서 기우제까지 지내고 있지만 기다리는 비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슈퍼컴퓨터를 도입해 기상청 예보 인프라를 확충하고 전문인력을 보강했으면 가뭄의 징후를 포착하고 관개(灌漑)전략을 마련해야 했을 터이나 적절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 21세기에 지내는 기우제도 난센스이지만 대통령이 소방차를 끌고 가 논에 물 뿌리는 일도 참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다.
노동시장의 뜨거운 감자 정년연장 문제도 그렇다. 국회는 2013년 여야 합의로 ‘고용상 연령차별 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법’을 만들어 법정 정년 한도를 60세로 연장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슈들이 입법 과정에서도 주요하게 논의되었지만 급속한 고령화와 조기퇴직으로 인한 중고령자 실업문제가 노동시장의 핵심 이슈로 부상할 것이라는 취지에서 입법이 강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지속되자 국회는 법 시행 시기를 사업장 규모에 따라 3, 4년씩 유예했다.
그리고 2년의 시간이 지났다. 당장 몇 개월 뒤부터 300인 이상 대기업과 공공기관 근로자들의 정년이 60세로 연장되지만 입법 과정에서 쟁점이 되었던 임금체계 개편 등의 핵심 이슈들 가운데 무엇 하나 노사정간 합의에 이르거나 제대로 해결된 게 없다. 발등의 불을 꺼야 하는 정부는 시간에 쫓겨 정책적 해법들을 두서없이 제안하고 있고, 기업은 기업대로 뭘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은 채 헤매고 있다. 겉으로는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노동조합도 실상은 전략 부재로 어수선한 상황이다. 당장 법 시행을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사태가 이토록 복마전인데 2013년 입법을 주도했던 국회는 뒷짐 진 구경꾼의 자세다. 게다가 당시 입법 주관기구였던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상임위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사후 관리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국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입법 당시 환노위 여야 간사를 맡고 있던 두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정년연장에 따른 임금조정이 쟁점이 될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 “환노위 법안심사소위 속기록에 입법 취지를 분명히 남겼다. 법 조문의 임금체계 개편은 임금피크제뿐만 아니라 성과급제 개편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건 고용노동부의 확인을 받으면서 넣은 만큼 확실하다”고 밝히고 있다. 속기록의 제도적 위상이 법에 준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건만 뭐가 ‘확실하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입법과정에서 제도의 효과와 부작용이 예견되었다면 국회는 효과를 극대화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해법을 모색했어야 한다. 특히, 노동조합이 우려하는 임금 삭감의 이슈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기업의 인사체계 혼란을 줄이기 위한 제도적 지원 방안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입법자는 지난 2년간 책임을 갖고 논의하고 대안을 모색했어야 한다. 그러나 입법 주체들은 논란만 남겨두고 자리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상에서 그려본 에피소드가 2015년 우리의 자화상이다. 예고되었지만 준비하지 않은 결과로 전염성 질병이 확산되었고, 기업의 임금ㆍ인사시스템은 아노미에 빠졌다. 정부는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대고 있고, 노동조합은 상상력의 가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업, 노동조합, 정부 모두 반성해야 할 일이나 누구보다 큰 책임은 국회와 청와대의 몫이다. 이제라도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로 재무장하기 바란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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