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적인 계파 갈등과 연이은 막말로 상처 난 새정치민주연합의 아픔이 쉽게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부실한 체력을 절감한 당 지도부가 김상곤 전 경기교육감을 중심으로 혁신위원회를 출범시켜 힘을 실어주었지만 아직은 의문 부호만 가득한 모습입니다.
불안한 시선 속에서 혁신위는 21일부터 2박3일 일정으로 광주에서 첫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당 안팎의 의문 부호를 긍정적 기대로 바꾸기엔 지난 4·29 재보선 참패의 현장이자 민심 이반의 핵심인 광주만큼 적절한 곳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혁신위의 첫 워크숍 테마는 ‘쓴 소리 잘 듣기’와 ‘끝장 토론’에 맞춰졌습니다. 전언(傳言)에 전언의 형태로 여의도에서 듣는 민심을 믿지 않고 직접 환부를 들여다 본 뒤 집단 지성으로 결과물을 내놓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실제로 첫날부터 김상곤 위원장은 호남지역 기초단체장들과 간담회를 열어 여론 청취에 나섰고, 혁신위원들도 자신들의 주전공을 살려 광주 곳곳에서 민심 듣기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혁신위가 접한 여론은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먹은 밥이 소화가 안 될 만큼’ 강도가 높았다 합니다.
당장 기초단체장들은 김 위원장 면전에서 “당 지도부의 권한을 정지해야 호남 민심이 돌아온다”는 주장부터 펼쳤습니다. 16명의 기초단체장들은 최초 인사말 정도만 언론에 공개하자는 혁신위의 제안을 거부하고 한 마디씩 작정한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언론에) 비공개로 할거면 뭣 하러 간담회를 한당가. 당당히 우리 이야기를 들어보쇼”라고 말문을 뗀 이들은 “국민 신뢰 얻기 위해 혁신위 활동 동안이라도 대표 최고위 권한을 정지해라. 모든 권한을 혁신위에 줘라. 계파나 지역 (고려) 없이 새정치연합 살아갈 방법을 만들 때까지 (당 지도부는) 백의종군해야 한다”(김철주 무안군수), “김상곤 위원장에게 당 전체를 맡기고 처음부터 끝까지 바꿔내지 않으면 신뢰하지 못한다”(강인규 나주시장) 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호남 홀대의 원흉으로 지적된다는 문재인 대표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은 간감회 내내 ‘날 것’의 단어로 이어졌습니다.
같은 시간, 다른 혁신위원들 귀에 들어온 민심도 싸늘하긴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동학 혁신위원은 전남대 인근에서 호남 청년 당원과 당적이 없는 지역 대학생들과 티타임 형식으로 당에 대한 의견을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선 청년들은 “당이 하도 자기들끼리 싸워 얼마 없던 관심도 사라졌다”, “당이 청년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어떤 진정성도 보이지 못하고 있다”며 악평보다 더 뼈아픈 무관심과 냉소만 보냈다고 합니다.
호남 지역 법조인들도 새정치연합의 혁신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들 역시 “지금 혁신을 말해봐도 결국 총선 땐 이름 알려진 고위 판검사를 전략 공천해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줄 것 아니냐”, “지역 정치에 열심히 해봐야 당 지도부에 줄 서지 않은 사람은 빛을 보기도 힘든 데 혁신이 무슨 소용이냐”는 회의적 전망만 내놓은 것입니다.
호남 여론이 예상보다 심상치 않자 혁신위는 첫 날 밤부터 긴급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흩어져 있던 혁신위원들은 10시30분까지 워크숍 숙소로 모이라는 위원장의 긴급 메시지를 받고 서둘러 택시를 탔습니다. 회의에선 “상황이 심각한 만큼 첫 혁신안의 수위를 더 높여야 한다”는 격정적인 발언부터 “예상했던 일이다. 여론에 휩쓸리지 말고 5단계 혁신안 틀을 견고히 맞추는 데 신경 써야 한다”는 신중론까지 다양한 발언이 오고 간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잠을 설치다시피 일어나 둘째 날을 맞은 혁신위원들은 22일에도 강행군을 이어갔습니다. 오전엔 광주 시의원들 및 지역 원로들을 만나 또 한번 쓴 소리를 들었고, 오후엔 5·18 묘역을 참배한 뒤 ‘타운 홀 미팅’ 형식의 100인 원탁 회의까지 진행했습니다.
원탁회의는 혁신위원 한 명당 5명 안팎의 광주 시민들이 같은 조로 묶여, 당의 문제점과 해결방안 등 주제에 맞춰 포스트잇에 의견을 쓰고 조별 결과를 재취합해 전체 결과를 도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대부분 참가자들은 이런 형식의 회의는 처음이라 초반에는 모두 쭈뼛쭈뼛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다행히 조국 교수와 우원식 의원 등 혁신위원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면서 회의는 점점 속도가 났고, 회의 마지막에는 시민들이 앞 다퉈 마이크를 잡는 모습까지 연출됐습니다. “당의 전략과 정책 부재가 크지 않나”, “많은 공부 방법론이 나왔지만 중요한 건 실천이다. 당은 논의보다 실천부터 좀 해라”는 시민들의 뼈있는 발언들은 큰 박수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쓴 소리 듣기의 시간이 끝나자 혁신위원들의 끝장 토론이 시작됐습니다. 22일 오후 8시경부터 시작된 토론은 23일 새벽 2시까지 이어졌습니다. 혁신위원들은 이틀 동안 들은 여론과 그 동안 당이 내놓은 개혁안들을 참고해 각자의 ‘기득권 타파’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숙제를 펼쳐 놓은 혁신위원들은 이내 고민에 빠졌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각자의 안들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내용들로 ‘임팩트가 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밤은 깊어가고 혁신위원들은 결국 무리해서 새로운 안을 만들기보다 기존 개혁안을 조금 더 선명히 하는 방향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혁신위의 한 관계자는 “혁신안의 핵심이 5번째인 공천개혁인 점을 고려해, 차곡차곡 벽돌을 쌓듯 혁신안을 내놓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 막판에 설득력을 얻었다”며 “당장의 비판에 신경 쓰지 말고 뚝심을 가지고 다음 혁신안을 구성하자는 쪽으로 겨우 의견이 모아진 것”이라고 회의 마지막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또 다시 쪽 잠을 잔 혁신위원들은 23일 아침 일찍 최종 회의를 열었습니다. 발표할 혁신안 문구를 다듬고 예상되는 지적들에 대한 입장을 정리한 혁신위원들은 예정된 10시30분보다 십여 분 늦게 기자회견장에 도착했습니다. 혁신위의 첫 혁신안은 예상대로 튀진 못했습니다. 현역 국회의원 등 선출직 공직자에 대한 엄정한 평가 제도를 즉각 실시하고, 막말을 비롯한 해당 행위를 평가 항목에 포함하는 ‘교체 지수’ 도입 등이 핵심이었지만, 이들 안 모두 기존에 한 번씩은 언급된 내용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 대부분의 혁신위원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각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KTX에서 밀린 잠을 잤다는 한 혁신위원은 “(내용이 새롭지 않다는) 비판은 겸허히 수용하겠다. 다만 혁신안 내용보다 마지막 문구를 꼭 봐달라”며 “거기에 우리 혁신위원들의 마음과 2박3일의 핵심이 담겨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말한 혁신안의 마지막은 ▦혁신위는 혁신안의 의결을 위해 7월 이내에 조속히 중앙위원회 개최를 요구한다 ▦혁신위는 중앙위의 혁신안 통과를 혁신에 대한 의지 확인이자 대표에 대한 리더십을 판가름하는 잣대로 여길 것이다로 끝맺습니다. 이번 혁신안은 구체적 내용보다, 혁신에 대한 당 지도부의 실질적인 의지를 시험하려는 의미가 강하다는 점이 충분히 짐작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24일 열린 새정치연합 최고위원회에서는 전날 발표된 혁신안에 대한 구체적 응답이 없었습니다. 문 대표는 혁신안 자체를 언급하지 않았고, 오영식 최고위원만이 “혁신안의 실천을 위해 지도부가 앞장 서 노력할 것”이라는 원론적인 대답만 내놓았습니다.
지도부의 뜻과 상관없이 혁신위가 못 박은 7월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새정치연합의 여름이 혁신과 재도약의 기억으로 남을지, 새로운 분란의 시간이 될지는 또 다시 당 지도부의 의지에 달린 셈입니다.
정재호기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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