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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고 무치고 튀겨도 상차림의 완성은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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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고 무치고 튀겨도 상차림의 완성은 밥

입력
2015.06.2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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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하고 처음 내 개인 이메일 주소를 만들었다.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조합은 벌써 다 쓰여지고 있어 계정 통과가 안되길 몇 번. 홧김에 ‘밥이좋아요(babijoayo)’라고 넣었더니, 그건 가져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내 첫 개인 이메일 주소는 babijoayo@...가 되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출장과 야근이 잦아질수록 집밥 자체가 나의 정신적 안식처가 되었다. 저녁이면 일인용 뚝배기에 현미 찹쌀을 씻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다음날 퇴근해 돌아오자마자 약한 불에 올리면 30분 내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한 알 한 알이 폭신한 밥이 완성됐다. 여기에 밑반찬 몇 가지만 있으면 환상적인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아침도 점심도, 때로는 저녁도 직장에서 ‘때우는’ 일이 빈번했기에, 이렇게 먹는 집밥 한끼는, 간혹이기는 했지만,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큰 호사였다.

밥에 대한 애정은 어느새 요리에 대한 집착이 되었고, 몇 년 뒤엔 요리로 전업하는 ‘사고’를 쳤다. 저지르는 김에 대책 없이 레스토랑 키친의 막내로 들어갔다. 30대 중반에 다시 걸음마부터 배운다는 건, 육체적 노동의 강도 그 이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 전까지 안이하게,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많은 것들이 키친이라는 환경 속에서 무너졌다. 살면서 밥맛이 없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었는데, 그 시기 집에서 겨우 뜬 한 공기의 밥을 먹으면서 ‘밥이 까끌하다’ 못해 ‘모래 씹는 느낌’이라는 표현을 절로 이해하게 되었다. 버텨야 했기 때문에 한동안 난 밥을 꾸역꾸역 쑤셔 넣고 하루하루 전투에 임하듯 출근했다.

밥이 좋아서 한 일인데, 밥을 먹을 수 없다니…. 멀리 돌아온 나 자신은, 결국 내가 매일 해먹는 밥이 가장 좋았고, 또 중요했다는 걸 깨달았다. ‘밥의 힘’ ‘밥의 의미’ ‘밥의 아름다움’….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이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뉴욕에서 한식 요리 클래스를 열고, 가르치기 위해 또 다시 밥을 해먹고, 다시 배우면서, 드디어 난 ‘밥’을 단순한 습관에서 어엿한 음식의 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계절과 명절에 맞춰 어떤 메뉴를 준비하든 가정식 요리 클래스에는 거의 밥이 들어간다. 볶고, 삶고, 튀기고, 무치고, 쪄서 만든 갖가지 화려하고, 슴슴하고, 자극적이고, 부드러운 음식들을 살짝 이어 한상차림을 완성하는 보이지 않는 선이 밥이라는 것. 이제 겨우 알아서 창피하기도 하고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기도 하다.

밥에 콩, 채소, 나물, 다른 곡물 등을 섞어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당연하지만, 한식 요리를 배우러 오는 많은 외국인들에겐 그렇지 못하다는 걸 나도 가르치면서 배웠다. 말린 취나물을 불려 넣으면 향기로운 밥이 지어지고, 단호박, 자색 고구마를 넣으면 밥의 색감이 화려해진다. 봄에는 콩콩 박혀있는 완두콩밥이 귀엽다는 느낌마저 든다. 팥밥이 맛있다는 걸 깨달은 것도 최근이다.

뉴욕 사람들은 대다수가 전기 밥솥이 없다. 보통의 뉴욕 사람들이 사는 협소한 아파트 공간에 두기엔, 가끔 밥만을 짓기 위해 만들어진 이 커다란 주방기기는 너무 효율적이지 못하다. 어떻게든 자신의 부엌에서 만들 수 있는 한식을 가르치는 것이 나의 일이다 보니, 한두 개는 가지고 있을 솥이나 냄비에 쌀을 불리고 가스레인지에 밥을 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밥이 다 되어 솥뚜껑을 여는 순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윤기 흐르는 밥은 의외의 감탄사를 불러일으킨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 중에도, 무조건 버텨야 할 시기에도, 언제나 밥이 있었다. 물처럼, 공기처럼 항상 해먹던 밥이라서 가끔 거기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다. 그런데 아직도 새롭다. 매번 지을 때마다 다시 배우고 있다. 갓 지은 따뜻한 밥 한 숟가락은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작은 토닥임이기도 하다. 가끔 내 첫 이메일 주소가 ‘밥이좋아요’였다는 게 생각나 웃음이 난다. 이렇게 오래, 꾸준히, 격하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김신정·한식 컨설팅 ‘Banchan Story’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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