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지역 고유의 식문화 고스란히, 발효·저장 식품이 특히 발달
돼지 뒷다리 말린 프로슈토, 이탈리아에서만 먹을 수 있어
40개월 숙성한 치즈 깊은 맛, 포도로 만든 식초도 유명
미식(美食)이라는 말에는 화려한 세공의 이미지가 있다. 복잡한 조리과정과 현란한 플레이팅으로 요리를 기술이 아닌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야만 할 것같은 강박의 뉘앙스. 머리 속에서 파스타와 피자의 나라로 자동 번역되는 미식 국가 이탈리아는 그래서 종종 의미의 충돌을 빚는다. 그 소박하고 단순한 요리들을 떠올리면, 이탈리아의 미식에는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뭔가가 따로 있으리라 막연히 추측하게 된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KPF 디플로마드’ 과정의 일환으로 약 2주간 이탈리아의 음식문화를 취재했다. 요리의 잔기술 대신 식재료라는 음식의 근간에 집중하는 것, 이것이 이탈리아의 미식이다. 미식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이 장화 나라의 음식문화는 왜 슬로푸드 운동이 이 땅에서 비롯됐는지를 설명해준다. 르네상스를 근본으로의 회귀라고 정의한다면, 이탈리아의 음식은 언제나 르네상스적이다.
파스타는 첫 번째 코스요리
이탈리아 사람들은 파스타와 피자를 정말 많이 먹을까. 그렇다. 특히 파스타를 ‘정말’ 많이 먹는다. 피자보다는 리조토가 더 빈번히 먹는 음식이다. 이탈리아의 정찬 코스에서 육ㆍ어류 요리에 앞서 간단히 한 접시 먹는 음식이 파스타다.
이탈리아에서 정찬을 먹으려면 간단한 ‘서바이벌 이탈리안’을 익혀야 한다. 많은 식당들이 메뉴판부터 손님 접대에 이르기까지 ‘아니, 영어를 왜 써?’의 태도로 이국의 고객을 나무라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탈리아어로! 첫째와 둘째 중 첫째가 더 중요하다는 게 우리의 언어감각이지만, 이탈리아의 정찬에서는 두 번째가 메인요리다. 전채요리인 안티파스티(Antipasti)로 염장해 말린 돼지 뒷다리 프로슈토나 호박꽃, 허브 등을 튀긴 채소튀김을 먹고, 첫 번째 요리인 프리미 피아티(Primi piatti)로 파스타나 리조토를 먹는다. 우리가 흔히 먹는 봉골레나 알리오올리오보다는 만두처럼 고기와 채소로 속을 채운 파스타인 토르텔리니(둥근 모양)나 라비올리(네모 모양)가 흔하다.
두 번째 요리, 세콘디 피아티(Secondi piatti)는 고기나 생선 요리가 나오는 메인 디시다. 티본스테이크 하면 미국이 떠오르지만 사실 원조는 이탈리아, 그 중에서도 피렌체다. 본명은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 손가락 두 마디만한 두께에 보통 사람 얼굴 크기만한 고기가, 피가 뚝뚝 떨어질 것같은 레어 상태로 제공된다. 더 구워 달라는 요구는 이탈리아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다. 피렌체의 소문난 맛집 ‘트라토리아 다 티토(Trattoria Da Tito)’의 메뉴판에는 아예 영어로 ‘레어 온리(Rare Only)’라고 씌어있다. ‘그랬다가는 화를 내겠음’이라고 읽히는 ‘다른 굽기를 요구하지 마시오’의 문장도 덧붙여져 있다. 하긴, 그 식당의 짓궂은 웨이터는 네 번째 음절에 액센트를 줘야 알아듣는 ‘아메리까~노’ 주문에 검지 손가락을 흔들며 에스프레소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 고집 센 손님에게 진짜로 에스프레소를 내왔으니까.
달콤하다는 뜻인 줄 우리가 익히 아는 돌체(Dolce)는 후식이다. 이탈리아 대표 디저트 티라미수가 흔하다. 안티파스티 앞에 식전주와 식전빵이 나오기도 하고, 돌체 전에 치즈(포르마지)가 서빙되기도 한다. 중요한 정보 하나. 피클은 이탈리아 식탁에서 절대 구경할 수 없는 사이드 디시다. 웨이터를 불러 피클 좀 달라고 요구하면 안 된다.
화려하지 않지만 간결한 요리
수백 개의 도시국가들을 통일한 지 150여년밖에 안 된 나라답게 지역 고유의 식문화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게 이탈리아 음식의 특징이다. 프랑스만 해도 파리가 막강한 중앙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반면, 이탈리아는 식문화가 매우 보수적이고 타 문화권에 대해 배타적인 성향이 강해 지금까지도 20개의 주가 확연히 다른 지역별 전통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 어느 식당을 가봐도 소박한 인테리어에 투박한 접시가 나오는 이탈리아 음식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사실 프랑스처럼 화려한 고가의 ‘오트 퀴진’으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토양과 뜨거운 햇살이 산출하는 식재료 자체의 탁월함으로 인해 조리의 과정이 소략하고 간결한 탓이다.
이곳에서는 토마토도 우리가 아는 그 토마토가 아니다. 달디 단 토마토! 형용모순 아닌가. 샐러드도 이렇다 할 드레싱 없이 올리브유에 소금만 곁들여 재료 고유의 맛에 집중한다. 발사믹 식초를 첨가하는 건 이탈리아식이 아니다. 대신 양질의 식자재를 오래 두고 천천히 먹을 수 있는 발효, 저장식품이 발달했다. 맛과 영양의 균형을 본질로 삼는 이탈리아 식문화의 기본 슬로건은 그래서 ‘웰 이팅, 웰빙(Well eating, wellbeing)’이다. 건강한 식생활이 시대정신이 된 오늘날, 이탈리아 음식이 새삼스레 빈번히 호출되는 이유다.
‘프로슈토-치즈-발사믹 식초’의 황금 트라이앵글
좋은 식재료 말고 이탈리아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을 원한다면 프로슈토를 받아들여야 한다. 돼지 뒷다리를 잘라 염장한 후 말려 먹는 반건조 육회 프로슈토-스페인에서는 하몽이라고 부른다-는 박찬일 셰프가 2011년 쓴 책 ‘어쨌든 잇태리!’에서 말했듯 소금과 바람과 시간이 만드는 음식이다. 익숙해지는 데에도 적잖이 시간이 걸린다. 우리나라에서는 기껏해야 멜론에 한 겹 감싸 애피타이저로 먹는 음식이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차돌박이처럼 얇게 썰어 한 접시 가득 내놓는다. 보통 막대과자처럼 기다란 빵 그리시니에 돌돌 감아 먹거나 빵 사이에 끼워 먹는데, 대패로 밀듯 얇게 썰어야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는 맛을 느낄 수 있다. 그 지역에서 난 곡물을 먹여 키운 그 지역의 돼지를 그 지역의 바람으로 말려 만드는 프로슈토는 그래서 지역에 따라 재료와 제조법이 각기 다르다. 프로슈토는 부드럽고 단 맛이 강한 반면, 쿨라텔로는 숙성 과정 중 와인에 재우는 절차가 추가돼 훨씬 풍미가 진한 식이다.
미식의 본고장이라 할 만한 파르마의 음식 중 프로슈토만큼 유명한 게 치즈. 우리가 흔히 파마산 치즈라고 부르는 이곳의 딱딱한 덩어리 치즈는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가 정식 명칭이다. 이탈리아 북부의 파르마와 레지오 에밀리아를 중심으로 생산돼 파르마 사람들과 레지오 사람들이 서로 우리 음식이라고 우기다가 붙은 이름이다. 생산과정을 보기 위해 찾아간 파르마의 한 치즈 공장 저장고. 대표 크랑코 캄파니씨는 커다란 북처럼 보이는 치즈 덩어리가 가득 찬 저장고에서 몇 덩어리의 치즈를 꺼내 망치로 여기저기를 두드렸다. 숙성의 정도에 따라 울리는 소리가 달라졌다. “이 소리에 따라 치즈의 등급이 달라지죠.” 10개월, 30개월, 40개월 숙성된 세 종류의 치즈는 맛도 각기 달랐다. 오래 묵은 것일수록 강하고 깊은 맛이 난다. 이탈리아 소시지인 살라미나 담백한 크래커 등을 곁들여 와인과 먹으면 좋다.
인근 몬데나는 와인처럼 식초를 시음하는 도시다. 발사믹 식초의 도시인 이곳에서 생산되는 프리미엄 발사믹 식초를 ‘아체토 발사미코’라고 부르는데, 파르마, 모데나, 볼로냐 등을 품은 미식지역 에밀리아 로마냐 지역에서 재배된 포도로 만든다. 아체토 발사미코보다 덜 엄격한 조건하에 만들어진 콘디멘토 발사미코는 저렴한 가격에 신맛이 덜해 요리에 양념처럼 넣기 좋아 대중적으로는 더 인기가 높다. 식초도 와인처럼 저장창고에서 오크 숙성하며, 12년에서 25년까지 발효시켜 빈티지 식초로 판매한다. 모나리 페데르조니 공장에서 빈티지별 식초를 시음해봤다. 오래 숙성시킬수록 맛이 점점 순하고 달콤해졌다. 향도 우아해졌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음식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영혼이라는 수사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토리노ㆍ파르마ㆍ피렌체ㆍ모데나= 글ㆍ사진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취재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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