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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어든] 한국의 승리가 ‘기적’이라고?

입력
2015.06.23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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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리버풀의 팬들 사이에선 여전히 ‘이스탄불의 기적’이 자주 회자되곤 한다. AC 밀란(이탈리아)과의 2004-2005 유럽축구연맹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바로 그 ‘기적의 경기’다. 전반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AC 밀란이 3-0으로 이기고 있었으나 후반전 들어 리버풀이 6분 동안 3골을 몰아치며 경기를 승부차기까지 끌고 갔다. 결과는 리버풀의 우승이었다. 최고 빅매치에서 유명 클럽들이 이 정도의 드라마를 썼기에 ‘Miracle’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게도 느껴진다.

AP 연합뉴스
AP 연합뉴스

개인적인 역량만 보면 밀란 선수들의 재능이 훨씬 뛰어났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리버풀이 개인기량, 상황, 분위기 등을 모두 극복하고 드라마 같은 승리를 만들어냈기에 ‘기적’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경기가 됐다.

한국 스포츠 언론은 ‘기적’과 ‘비극’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매우 즐기는 것 같다. 물론 다른 나라 언론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찾아볼 수 있는데, 잉글랜드 언론은 2경기를 연속으로 패하면 ‘재앙’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신인 선수가 골절상과 같은 큰 부상을 당해도 ‘비극’이라는 표현이 종종 나온다.

한 축구 선수의 커리어와 꿈을 고려해보면, 대표팀 데뷔를 몇 시간 앞두고 갑자기 경기를 뛸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사건은 ‘비극’이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강수일에게 그러한 기회가 다시 올지조차 장담할 수 없기에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런가 하면 기적이 아닌데 기적으로 묘사된 상황들도 분명히 있다. 한국 언론은 스페인을 상대로 후반에 두 골을 터뜨려 승리를 거둔 여자대표팀을 ‘기적’으로 표현했다. 물론 여자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보여준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대한민국의 여자 축구 현실이 결코 밝은 것은 아니고 장애물도 많다. 하지만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국 여자 축구가 ‘슈퍼파워’는 아니어도 ‘피라미’정도의 존재감도 아니다.

18일 오전(한국시간) 캐나다 오타와 랜스다운 경기장에서 열린 2015 캐나다 여자 월드컵 조별리그 스페인의 경기에서 한국이 2대1로 승리하며 16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경기를 마친 한국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18일 오전(한국시간) 캐나다 오타와 랜스다운 경기장에서 열린 2015 캐나다 여자 월드컵 조별리그 스페인의 경기에서 한국이 2대1로 승리하며 16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경기를 마친 한국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축구협회 제공
대한축구협회 제공

FIFA 랭킹이 축구 실력을 말해주는 객관적인 자료가 아닐 때도 많지만 참고할만한 기준 정도의 역할은 할 수 있다. 객관적인 눈으로 봤을 때 세계 18위에 랭크 된 팀이 14위를 꺾은 것을 기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두 골이 경기 종료 직전 5분 안에 다 나왔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 여자 대표팀의 승리는 멋지고 감동적이었으나 ‘기적'으로 묘사될 만큼은 아니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한국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경기였고 그만한 실력도 있었다.

K리그 성남FC가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 광저우 헝다(중국)를 2-1로 꺾은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승리도 기적이라며 찬사를 보낸 사람들이 있었으나, 냉정하게 말해 그 결과는 기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깜짝 승리와 기적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한다. 성남이 홈에서 광저우를 꺾은 것은 아주 커다란 깜짝 쇼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조직력이 훌륭한 K리그 팀이 중국 상위권 팀을 홈에서 꺾은 것은 그리 놀라운 사건이 아니다. 게다가 당시 광저우 스쿼드에는 주요 스타 선수들이 빠져 있었기에 성남이 이길 확률은 충분히 있었다.

감독만 봐도 김학범과 칸나바로를 비교할 수 없다. 김학범 감독은 경륜, 지략, 축구 전술, 리더십을 고루 갖춘 아시아의 수준급 지도자로서 K리그에서 가장 성공적인 감독 중 하나다. 반면 칸나바로는 발전 가능성이 있는 초보 지도자일 뿐, 김학범 감독의 레벨에 근접하려면 갈 길이 멀다.

광저우에서는 굴라트 한 명이 대단한 기량을 보여줬을 뿐이지만, 성남은 다수의 선수들이 K리그 정상급의 견고한 실력으로 맞섰다. 아시아에서 김두현, 김철호, 임채민, 박태민 등이 포진한 라인업을 무시할 수 있는 팀은 많지 않다.

광저우 라인업에는 좋은 중국 선수들이 꽤 있었다. 황보원, 펑샤오팅, 가오린 등은 K리그에서 뛰었거나 K리그 팀과 경기한 적이 많은 선수들인데, 이들의 기량인 괜찮기는 하지만 아주 특별할 것도 없다. 정즈는 점점 느려지고 있었고, 리수에펑의 실력으로는 성남의 주전도 차지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김학범 성남 FC 감독이 27일 오후 중국 광저우 톈허스타디움에서 열린 2015 AFC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광저우 헝다와의 경기에서 선수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김학범 성남 FC 감독이 27일 오후 중국 광저우 톈허스타디움에서 열린 2015 AFC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광저우 헝다와의 경기에서 선수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성남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성남이 연출한 챔피언스리그의 진정한 기적 혹은 재앙은 2004년 결승전에서 나왔다. 당시 성남은 사우디 원정에서 3-1의 값진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지만, 홈에서 0-5로 믿기지 않는 충격패를 당하며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몹시 추운 겨울밤이어서 알 이티하드 선수들이 너무 싫어하는 날씨였지만, 결과는 그렇게 나왔다. 알 이티하드 입장에서는 기적일 수도 있었다.

“헤드라인을 작성하려면 ‘기적’ ‘재앙’과 같은 단어를 쓸 수도 있지, 까칠하게 왜 그러세요?” 라고 반문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괜찮은, 좋은 결과를 ‘기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들이 한국 축구의 위상과 이미지를 깎아 내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저러한 사고는 한국 축구가 근본적으로 유럽-남미보다 약하며 승리를 만들어낼 역량이 없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기에 문제다. 하지만 세계 속의 한국 축구는 결코 그 정도 위치에 있지 않다. 부상으로 주전들이 빠진 중국리그 우승팀을 K리그 팀이 홈에서 이긴 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한다면 이는 슬픈 일이다.

세계 18위 팀이 컨디션이 안 좋은 14위 팀을 꺾는 것을 기적적인 승리라고 묘사한다면 여자 축구 최강국들인 미국-일본과의 결승전에서 역전 우승했을 때는 어떠한 표현을 써야 할까?

예상을 넘어선 멋진 승리를 저러한 과장된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적절한 형용사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진정한 기적이 나타났을 때 그 기적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말이다.

내가 바라는 기적은 (블랙번의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제외하고!) 한국 언론이 멋진-뜻밖의 승리에 ‘기적’이라는 단어를 남발하지 않는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승리가 기적으로 여겨질 만큼 한국 축구가 약하지도, 수준 낮지도 않다.

축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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