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우연히 어느 일본 방송프로그램을 보았다. 곧 한국은 붕괴할 수 밖에 없다는, 매우 자극적인 내용이었다. 방송에 등장한 패널들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높은 청년 실업률, 지나치게 빠른 퇴직 시기, 몇몇 대기업으로의 부의 집중 등 고질적인 경제 문제 때문에 한국은 조만간 망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경쟁하듯 한국 필망론을 내세우던 패널들 중 한 명은 발언 끝마다 농담하듯 이 말을 붙였다. “그래도 한국은 영화 하나는 잘 만듭니다.” 어두워진 마음에 작은 등불이 켜졌다.
해외 영화인들을 만나면 간혹 물을 때가 있다. 옛날에도 한국영화는 잘 만들어졌는지, 최근에야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가 질문의 요지인 경우가 많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양질의 한국영화들이 쏟아지는데 그 배경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1980년대 열성적인 영상 세대의 등장,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대기업의 시장 진출, 지방자치제 시행에 따른 여러 국제영화제의 출범 등이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한국영화의 압축성장을 이뤘다고 말하면 외국인들은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여기에 할리우드영화 ‘쥬라기공원’(1993)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더하면 의문 어린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린다. 물론 1990년대를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도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1993년 들어선 문민정부는 정권 후반에 세계화를 국정지표로 삼았다. 한국 경제의 한 단계 도약을 위해선 국제 표준을 따라야 하고 미국 등 여느 강대국들처럼 미래 먹거리인 영상산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게 당시 정부의 정책 기조였다.
‘쥬라기공원’이 안성맞춤의 구호로서 동원됐다. 94년 대통령자문기구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청와대에 제출한 보고서의 한 문구는 90년대 후반 내내 국가의 미래를 제법 생각한다는 사람들 입을 오르내렸다. ‘쥬라기공원’이 벌어들인 수익 8억3,000만달러는 자동차 150만대를 수출해 얻을 수 있는 돈과 맞먹는다는 문구였다. 영화 한 편을 그럴싸하게 만들어내면 힘든 노동을 반복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니 정책 결정권자와 국민의 귀는 솔깃해질 수 밖에.
‘쥬라기공원’을 도약대 삼아 영상산업 지원 정책은 날개를 달았다. 문민정부 뒤를 이은 국민의 정부가 갖은 세제 혜택과 종자돈을 대주며 충무로는 급속히 산업화 단계에 진입했다. 최근 만난 한 유명 감독이 “‘쥬라기공원’이 의도치 않게 한국영화 산업 발달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시간이 흘러 다시 ‘공룡’들이 국내 극장가를 점령하고 있다. ‘쥬라기공원’ 4편에 해당하는 ‘쥬라기 월드’가 지난 21일까지 관객 341만6,292명(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을 모으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90년대 공룡들이 힘을 보탠, 한국영화의 부흥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20여 년이 지나 할리우드의 공룡 영화는 극장가를 헤집고 다니는데 국내 문화산업의 현주소는 어디쯤 있을까. 영화산업은 분명 성장했고, K팝과 TV드라마로 대변되는 한류가 지구촌 곳곳으로 흘러 들었다. “우리도 ‘쥬라기공원’처럼 할 수 있다”는 무모하면서도 패기 넘치는 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성과다.
박근혜 정부도 문화의 경제적 중요성을 갈파했다. 정권이 닻을 올리자마자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내걸었다. 하지만 목청만 높을 뿐 추진 동력은 약하다. 영화진흥위원회 신임 위원장 공모를 놓고 1년 가까이를 허송으로 보냈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지난해 10월부터 공석인데 공모를 두고 최근 논란이 불거졌다. 국립오페라단 단장 자리도 1년 가까이 비워뒀다가 한예진씨를 임명했으나 자격 논란을 거치며 두 달 만에 다시 빈 자리가 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으로는 언론학자 출신이 최근 임명됐다.
문화단체 수장 자리를 비워두거나 비전문가를 수장으로 앉히면 아랫사람들이 더욱 창조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정권의 신념이 작용한 것일까? 요즘 공룡들의 고성을 들으며 의문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라제기 엔터테인먼트팀장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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