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3일은 이탈리아 파르티잔 주세피나 투이시(Giuseppina Tuissiㆍ사진)가 태어나고 숨진 날이다. ‘잔나(Gianna)’라는 애칭으로 더 알려진 그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군대에 맞서 싸웠고, 전쟁이 끝난 뒤 동지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1923년 밀란 아비아테그라소에서 태어난 잔나는 10대 말 무렵 반파시스트 전선에 가담했다. 2차대전 중 그는 후방 파시스트군 병원 간호사로 일하며 주로 비밀 연락업무를 맡았다. 전장 복귀를 원치 않던 부상병들에게 가짜 진단서를 끊어주고, 파르티잔에 가담하려는 이들에게 공산당 계열의 가리발디 52여단을 연결해주는 ‘가욋일’도 했다.
동지였던 남자친구를 잃은 직후인 44년 8월 잔나는 ‘캡틴 블랙’이라 불리던 루이지 카날리 부대에 배속됐고, 그는 점차 유명해졌다. 키는 컸지만 유난히 어렸고 가냘펐지만 누구보다 다부졌던 그를 파르티잔들은 ‘꼬맹이 잔나(small Gianna)’라 불렀다.
잔나와 카날리는 45년 1월 6일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돼 26일간 모진 고문을 당한다. 나치 SS친위대는 잔나를 인도받아 3월 12일 이례적으로 석방한다. 그들은 잔나를 ‘미끼’로 앞서 탈옥한 카날리와 파르티잔 지도부의 일망타진을 노렸다.
잔나는 망명을 마다하고 부대로 복귀했고, 45년 4월 스페인으로 망명하려던 무솔리니와 그의 연인 클라라 페타치를 코모 호 인근서 체포하는 데도 공을 세운다. 무솔리니와 클라라는 4월 28일 처형됐다.
이탈리아 전역에 승리의 ‘벨라 치아오(Bella Ciao)’가 울려 퍼지던 4월 29일, 잔나는 반역혐의로 체포된다. 심문자들은 동지를 팔았다고 자백하라며 다시 그를 고문했다. 잔나는 흔들림 없이 결백을 주장, 5월 9일 석방되지만 카날리를 비롯한 여러 동지들은 이미 처형된 뒤였다. 그는 파르티잔 지도부가 동지에게 행한 잔혹한 고문과 비민주적 재판을 성토했다.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누구보다 정의롭고 순수했어야 할 그들(당 지도부)이 파시스트, 아니 그보다 더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다”고 썼다.
22세 생일이던 45년 6월 23일 괴한들에게 납치됐다. 그의 시신은 코모 호에 버려져 있었다. 1957년 이탈리아 공산당 코모(Como)시 당서기 등은 45년 봄 잔나 등의 살인교사 혐의로 기소되지만 ‘모종의 장애와 저항’으로 재판은 마무리되지 못했다.
무솔리니의 연인 클라라가 호송 도중 잔나를 바라보며 “저 어린 여성이 어떻게…”라 물었고, 가리발디 여단 코미사르 미셸 모레티가 “너희가 그의 남자 친구를 죽여서”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자유와 정의보다 사랑과 복수가 잔나의 더 높은 깃발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파르티잔 지휘부는 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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