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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복원ㆍ기념관 건립에 여생 바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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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복원ㆍ기념관 건립에 여생 바칠 터"

입력
2015.06.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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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義士, 친일파 토벌ㆍ김구 선생 경호… 독립투사 최장 20년 복역

기념관건립 국비 확보했는데 지자체 외면 차질… 이해 안 돼

호국보훈의 달 6월이 오면 ‘박희광(朴喜光, 1901~1970) 선생 추모사업회’ 박정용(65) 사무처장의 가슴은 녹아 내린다. 중앙부처의 지원에도 불구, 지방자치단체의 미온적 태도 때문에 아버지 고 박희광 선생에 대한 추모사업이 몇 년째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 처장은 “선친은 구미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구한말 의병이던 조부를 따라 8살에 만주로 건너가 19살부터 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일제 요인 암살 요원으로 활동하다 20년 간 옥고를 치렀다”며 “독립투사 중 최장기복역수인 선친의 업적을 후손에 알리는 추모사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처장을 만났다.

_40년째 추모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공직에 있다 퇴직한 후에도 추모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1984, 1997년에 각각 금오산도립공원과 두류공원 인물동산 안에 부친의 동상을 제막했다. 57살이던 8년 전, 영남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아버지의 삶을 주제로 졸업 논문을 쓰는 등 다양한 추모 활동을 했다. 지금은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 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_추모사업은 어떻게 추진되고 있나.

“2013년 밀양박씨 경주공파에서 구미시 봉곡동에 2,000㎡의 땅을 기증했고, 기념사업회가 자부담으로 4,500만원을 내놨으며, 국가보훈처의 국비 7억원도 확보됐다. 나머지 30억원을 구미시와 경북도가 맡아 달라는 것이다.”

_지자체가 지원에 소극적인 이유가 있나.

“구미시가 2011년 2억9,000만원을 들여 선생의 동상을 새로 단장했기 때문에 다시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에 시비를 지급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구미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인데 동상건립 지원했다고 다른 사업을 외면하는 행태를 납득하기 힘들다.”

_가까이에서 본 부친 박희광은 어떤 분이었나.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분이었다.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것도 그렇지만, 나라를 되찾고 평화로운 시절에도 지사의 풍모를 잃지 않았다. 부친은 해방 후 백범 김구선생을 만나 20년 독립운동의 경과를 보고한 후 비서를 통해 위로금 2,000원을 받았는데, 10년간 주위에 다 베풀었다. 당시 집 한채 가격이 100원이었으니 집 스무 채를 어려운 이들에게 베푼 셈이다. 어린 시절 마당에 손수레가 10여 대 도열해 있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모두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준 것이다.”

_독립운동 얘기는 많이 들었겠다.

“독립운동하다 체포된 부친은 대나무를 뾰족하게 깎아서 손톱 사이로 끼워 넣는 고문을 당해 여덟 번이나 기절했다고 한다. 또 작전 수행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던 순간 등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체험담을 들려주셨다. 같이 목욕탕에 갔다가 몸에 남은 총상을 본 기억이 생생하다. 수술 의사가 없어서 몸에 박힌 총알을 직접 빼냈다는 말씀이셨다.”

_생계는 어떻게 꾸렸는가.

“아버지가 붕어빵과 오징어를 구워 팔았다. 저도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머니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산후조리를 잘못해 마흔도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_선생은 작고하기 2년 전인 1968년에서야 건국훈장을 받았다. 늦은 감이 든다.

“해방 후 모두들 자신의 공적을 내세울 때 아버지는 내내 침묵하셨다. 김구 선생이 돌아가실 때 아버지가 경호 책임자로 있었는데 잠시 고향에 내려온 사이 변을 당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슴 한 켠에 늘 죄책감을 안고 사셨다. 훈장 수여는 부친의 공적을 잘 아는 지인들의 노력과 권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967년 초에 동아일보 대구지국에서 부친의 관동성 지방법원 재판 기록이 게재된 동아일보(1924년 9월1일자)가 발견됐다. 이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이듬해 훈장을 받았다.”

_지금 박희광을 다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모든 분들은 후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한다. 그런 어른들을 푸대접하면 나중에 나라에 다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누가 발 벗고 나서겠는가.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면 나라의 장래도 기약할 수 없다. 박희광 기념사업도 그런 맥락의 연장이다.”

-앞으로 계획은.

죽기전에 기념관 건립을 성사시키는게 소망이다. 부친의 공적을 알리거나 문중을 자랑하고 싶은 생각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치욕을, 후손들이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경북도와 구미시, 그리고 국민들이 열린 마음으로 여론을 수렴해주었으면 한다.

김광원 엠플러스한국기자

●약력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칠곡군청 공보실, 구미시청 기획실 사진담당,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 의료보험관리공단 관리과장, 박희광 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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