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스테펜 앰브로스
의예과 진학 후 역사학자로 전향…영웅서사 베스트셀러 작가로
'더 퍼시픽' 휴 앰브로스
아버지 자료 수집 거들며 경험…보통 군인들 이야기로 대박
소년의 아버지는 2차대전 중 미 해군 군의관이었다. 그는 부상병들 틈에서 전장의 풍문과 무용담을 들으며 자랐고, 전선의 기록영화들을 넋놓고 관람하곤 했다. 50년대 중반, 청년이 된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위스콘신대 의예과에 진학하지만 이내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훗날 뉴올리언스대 역사학과 교수가 된 그의 주 관심분야는 2차대전사였다. 그는 학자로서보다는 대중 역사서, 특히 논픽션 영웅서사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큰 명성을 얻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난 10살이었어요. 전장에서 돌아온 베테랑들은 당시의 내겐 야만으로부터 이 세계를 구한 거인들이었죠.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영웅 숭배주의자입니다.”(NTY, 2002.10.14) 그가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 1992)’의 저자 스테펜 앰브로스(Stephen Ambrose, 1936~2002)다.
스테펜에겐 다섯 아이가 있었다. 그는 책 취재 여행이나 역사 현장 답사에 아이들과 함께 다니곤 했고, 그 역사의 현장에서 자신을 매료시킨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이야기를 하며 글의 얼개를 구상하고 질문에 답하며 취재의 구멍을 메웠다. 그는 새벽 4시면 일어나 원고를 썼고, 다 쓴 글을 온 가족을 모아놓고 낭독하기도 했다. 그건 전직 고교 교사였던 아내(Moira)의 비평을 듣고자 해서였지만, 아이들을 교육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막내 휴(Hugh) 앰브로스는 가장 열성적인 청자 가운데 하나였다. “10살 때였어요. 아버지와 우리는 몬태나 주에서 아이다호 주로 이어지는 롤로(Lolo) 트레일을 하이킹했죠. 루이스와 클라크가 걸었던 바로 그 길입니다. 눈도 오고 우박도 쏟아지던 그 길을 꼬마인 나도 내 장비를 매고 걸었어요. 아이에겐 험한 여정이었지만 무척 즐거웠고, 그 때 뭔가가 나를 사로잡은 것 같아요.”(몬태나매거진, 2010.10) 휴는 2010년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쌍을 이루는 2차대전 미니시리즈 ‘더 퍼시픽(The Pacific)’의 컴패니언북을 출간하고, 드라마 제작 전반의 고증과 자문을 맡았다. 휴 앰브로스가 5월 23일 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48세.
모르는 이가 있을까 싶지만 부연하자면, 밴드 오브 브라더스(드라마 2001년)’와 ‘더 퍼시픽(The Pacific, 2010년)’은 책 제목이자 미국 민영 케이블방송 HBO가 제2차세계대전의 유럽 전투와 태평양 전투를 소재로 만든 각 10부작 미니시리즈다. 두 드라마 모두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가 제작 및 감독을 맡았고, 모두 그 해의 에미상을 석권하다시피 했다. 밀리터리 마니아 중에는 인류가 만든 전쟁 영상물을 통틀어 저 둘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이들이 적지 않다.
‘최고’는 사실 위험한 단어다. 평가란 게 결국 주관적인 거여서 서술적으로도 위험하지만, 서열을 절대화한다는 점에서 미학적으로도 그리 탐탁한 말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이 치른 2차대전의 양상을 그만한 스케일과 디테일로 담아낸 작품이 아직 없다는 점에서, 또 미국인들이 ‘위대한 세대(The Greatest Generation)’라 우러르는 세대- 대공황기에 태어나 대전을 겪고 경제부흥을 일군 세대-의 희생을 그만큼 극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 없다는 점에서, 최고라는 평가는 결코 과하지 않다. 날짜와 날씨, 서사, 배경, 전투별 사용 무기에 이르기까지, 드라마의 장면 하나하나를 난도질하다시피 하며 진위를 따지고 트집 잡아온 ‘밀덕’들의 열정은 저 작품들에 지닌 애정의 반증이었고, 드라마의 가치를 훼손하기보다 그 명성을 신화화하는 데 일조했다. 그 밑그림과 디테일을 제공한 이가 스테펜과 휴 앰브로스 부자였다.
휴 알렉산더 앰브로스는 1966년 8월 12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그는 작고한 어머니 모이라 버클리의 세 아이중 막내였는데, 스테펜은 68년 버클리와 결혼하면서 아이들을 입양한다. 일가는 스테펜의 학교가 있던 뉴올리언스에 정착했고,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겪은 뒤 몬테나 주 헬레나로 이주했다.
휴가 몬태나대 역사학과를 졸업한 뒤 스테펜은 아들에게 로스쿨 진학을 권했다고 한다. 좋은 직장을 얻고 돈을 잘 버는 데 유리하다는 게 휴를 설득한 스테펜의 논리였다.(위스콘신스테이트저널, 2012. 4.22) 하지만 청년 스테펜이 그랬던 것처럼, 휴는 역사학과 대학원 진학을 택했다.
그 무렵 스페텐은 ‘루이스와 클라크의 탐험(1804년 토머스 제퍼슨의 지시로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북미 대륙을 횡단하며 지리 등을 조사한 탐험)’으로 유명한 메리웨더 루이스의 전기 ‘Undaunted Courage 불굴의 용기(1996)’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휴에게 아버지가 전화를 건다. 자료 수집과 조사 작업을 거들어줄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잠시 머뭇거린 뒤 아버지가 주문(呪文)을 걸더군요. ‘급료를 줄게!’” 그게 90년대 중반이었다. 2차대전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일부터 벌지 전투와 독일 항복까지의 전사를 기록한 ‘Citizen Soldiers(1998)’, 1860년대 샌프란시스코와 아이오아주를 잇는 3,069km 대륙횡단철도(피시픽 레일로드) 건설사를 다룬 ‘Nothing Like It in the World(2010)’, 2차대전 B-24폭격기 조종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The Wild Blue(2001)’ 등등 이후의 그의 책들에 휴의 땀이 뱄다.
휴는 참전 군인과 유가족 등을 만나 인터뷰하고 편지나 일기 등을 수집해 사료와 대조해서 정리하는 등 작업을 했다고 한다. 스테펜은 다 쓴 초고를 휴에게 보내 읽어보게 했다. 휴는 점차 초고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보내게 되고, 토론하기도 한다. 말년의 스테펜은 휴를 신뢰하는 작업 파트너로 대한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드라마 제작 때도 폐암 투병 중이던 스테펜의 연락책이자 자문역으로 휴가 주로 촬영 현장을 지켰다고 한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에미상 1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돼 미니시리즈 최우수 작품상 등 6개부문상을 수상한다. 그 해 골든글로브 TV미니시리즈 부문 최우수 작품상, 방송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바디’상, 2003년 미국 각본가연맹상도 이어졌다. 에미상 시상식에 참석한 휴에게 “이게 끝이 아니야. 태평양 전쟁 드라마도 함께 하자”고 제안한 건 스필버그였다.
‘더 퍼시픽’은 해병 1사단 소속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고 드라마에도 주인공 가운데 한 명으로 등장하는 유진 슬레지의 책 ‘With the Old Breed(1981)’’와 로버트 레키의 ‘Helmet for My Pillow(1957)’를 뼈대 삼고, 휴가 보충한 다양한 자료들로 살을 붙여 만든 작품이다. 육군 101공수사단 506 낙하산 보병연대 2대대 5중대(Easy중대) 대원들의 동선을 따라가며 그들의 전투 양상을 그린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달리 ‘더 퍼시픽’은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투를 먼저 놓고 참전 부대(크게 해병 1사단 3개 연대)의 이야기를 잇고 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중대장이던 리처드 윈터스를 사실상 주인공(즉 스테펜의 ‘영웅’)으로 앞세운 반면, ‘더 퍼시픽’은 거의 매회 주인공이 바뀐다. 휴는 “아이젠하워나 패턴 장군 같은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군인들의 전투에 중점을 두고자 했다”고 뉴올리언스 신문 ‘nola’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진짜 군인들의 모습, 그들의 이야기를 담으려면 반드시 그런 평범한 군인들이 필요했고, 이야기도 거기 초점을 맞춰야 했습니다.” 절대악에 맞서는 숭고한 선의 전쟁이 아니라, 때로는 적보다 더 잔혹해지고, 번민하고, 두려워하고, 정신착란으로 바지에 오줌까지 지리는, 표백되지 않은 보통 군인들의 이야기가 ‘더 퍼시픽’에는 있다. 물론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 했던 선배 세대의 희생을 부각함으로써 후대가 그 정신을 계승하게 하겠다는 메시지는 두 작품이 공유하는 가치였다.
시청률에선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압도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첫 회 시청자는 무려 1,000만 명이었지만 ‘더 퍼시픽’은 300만 명 선이었고, 그 차이는 방송이 끝날 때까지 대체로 이어졌다. 거기에는 두 전쟁의 양상과 두 드라마의 관점이 다른 탓도 있겠지만, 미국 시민들에게 유럽 서부전선의 전쟁에 비해 대 일본 태평양전쟁에 대한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2010년 에미상 시상식에서 ‘더 퍼시픽’은 최우수 작품상을 포함 7개 부문 상을 수상했다.
스테펜은 80년대 이후 거의 매년 한 권씩 책을 쓸 만큼 다작했다. 아이젠하워와 닉슨 전기 등 대부분 베스트셀러였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외에도 영화나 방송 등의 역사 자문역으로도 늘 분주했고, 스필버그의 98년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컨설턴트로도 참여했다. 하지만 2002년 초 몇몇 책에서 표절을 한 사실이 드러나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는 “(몇 부분에) 인용부호를 붙이지 못한 실수”를 인정했고, 개정판에서 수정했다.
그에 대한 주류 사학계의 은근한 타매도 없지 않았다. 표절 시비 직후 콜럼비아대 역사학자인 에릭 포너는 “누구도 그처럼 많은 책을 그처럼 빠른 속도로, 더구나 잘 써내진 못할 것이다”(NYT, 02.10.14)라고 말했는데, 물론 찬사였겠지만 다른 의미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2002년 10월 그는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반면에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미국과 영국의 수많은 태평양전쟁 참전 군인들은 휴의 작업 덕에 한껏 기를 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반응은 엇갈렸고, 좋든 궂든 격렬했다. 한국과 달리 미국 시청자들로선 두 드라마가 자신의 부모나 조부모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The Pacific’에 대한 반응이 특히 더했는데, 휴에 대해선 모욕적인 글들도 적지 않았다. 일본군의 ‘사무라이 정신’을 지나치게 미화한 반면 해병대의 유약한 모습을 과도하게 부각했다는 비난도 있었고, 미군이 일본군 전사자의 금니를 뽑는 장면(제 5화, 제7화)을 트집 잡는 이들도 있었다. 대표성 없는 몇몇 참전 군인들의 “오락가락하는 기억과 기록”으로 그게 전쟁의 전모인 양 다룸으로써 모든 참전 군인(가족)들의 사적인 기억과 경험을 모독하면서 자신의 책은 태평양 전쟁의 정사(正史ㆍstraight-up history)가 아니라는 식으로 “정직하지만 교묘하게” 빠져나갔다고,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비꼰 이도 있었다.
그들에게 두 드라마는 최고는커녕 저급한 오락물에 가까울 테지만, 그 판단에는 두 부자가 전쟁으로 획득한 부와 명성에 대한 반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2001년 10월 월스트리트저널은 스테펜 부자가 인세 수입 등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연 평균 300만 달러라고 추산했다. 스테펜은 2000년 뉴올리언스의 국립 디데이 박물관 등을 건립하는 데 5년간 약 500만 달러를 썼다.
휴에게 더 가혹했던 건, 그가 아버지의 우람한 어깨 위에 앉아 비교적 빠르고 편한 길로 성장한 까닭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차별화하면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고자 애쓴 것도 맞다. 다만 그의 삶은 너무 짧았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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