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보다 이른 더위, 선풍기를 꺼냈다. 지난 여름, 비닐만 덮어두고는 처박아 둔 상태였던 탓에 날개고 어디고 때가 꼬질꼬질하다. 시원한 바람은커녕 먼지바람만 방안에 키우는 꼴이다. 시간을 내 목욕이라도 시킬 작정으로 한구석에 그냥 세워 뒀다. 그런데 그 멀뚱하게 서 있는 몰골이 무슨 만화에나 나올 어수룩하고 착한 강아지를 닮았다. 공연히 마음이 짠해진다. 자기가 어떤 연유로 붙들려온 줄 모르고 주변 눈치를 살피는 불쌍한 아이 같기도 하다. 왠지 과자라도 쥐어주고 만화 프로그램이라도 틀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일찍이 시인 김영승은 “선풍기를 발로 끄지 말자”고 특유의 천연하고 익살스런 어조로 일갈한 바 있거니와, 선풍기는 땀에 절은 내 몸을 서늘하게 해주고 스트레스를 식혀주는 착한 일만 묵묵히 행하는 존재. 1년 동안이나 저렇게 방치했다는 게 자못 송구스럽다.
문득, 시원한 바람은 고사하고 온갖 사소한 일로 마음의 온도만 부글부글 끓게 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누군가에게 내가 한여름 화롯불 같은 존재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가정엔 공연히 뜨끔해지기도 한다. 사람의 뜨거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열정이고 에너지일 수도 있지만, 그건 그 자신의 투철함과 진정을 스스로 관리하는 차원에서나 선의로 여겨지게 된다. 곧 닥칠 더 큰 더위, 선풍기를 닦듯 마음의 불씨들도 잘 조절하자. 선풍기야, 미안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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