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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느린 회전문

입력
2015.06.1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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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하다 보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상식에 반하는 액션이 필요할 때가 너무나도 많다. 뻔하면 매가리가 없다. 이별을 통고했다고 울고불고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다른 애인을 소개시켜줘야 한다. 상갓집에 갔다면? 춤을 추고 노래도 불러야 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이한테 깊은 뜻이 있었다. 그러면 멋져진다. 반드시 옳다고 믿었던 상식들도 다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얼마 전 광화문 앞에서 일을 보는데 15분 정도가 남았다.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커피숍이 보였다. 회전문을 찾아 바삐 들어가는데, 잉? 문짝이 느리다. 느려도 너무 느리다. 들어가던 호흡을 멈추고 하릴없이 쫄쫄 따라 들어갔다. 짜증까지는 나지 않았지만 무슨 회전문이 이다지도 느릴까, 하는 생각. 그리고는 그새 잊었다. 커피를 받아 나오는데 역시나 나올 때도 그 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기분이 묘해졌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마음이 평안해졌다. 이제까지 만났던 회전문 가운데 지나칠 정도로 느린 이 회전문에서 잠깐이지만 삶의 교훈을 얻었다. 회전문이라서 빠를 필요는 없구나. 꼭 그래야 되는 것은 어디에도 없구나!

속도를 느리게 조절한 경영자의 안목이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우리가 상상하는 일반화된 회전문의 본질을 넘어서 창의적인 발상으로 승화시켰다. 혹자는 비난도 했을 테고 바쁜 세상인데 해도 너무한다고 구시렁댔을 게 뻔하다. 그러나 그는 뚜렷한 의지를 가지고 신념을 관철시켰다.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여 무시하고 사는 인생의 가치를 깨우쳐주려는 의도가 숨어 있지는 않았을까. 경계를 넘어설 때는 그 만큼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맞다. 결혼을 하든, 술집에 들어서든, 연습을 하든, 친구를 만나러 다방에 들어가든 마음을 새롭게 해야 삶의 밀도가 촘촘해진다. 하물며 직장을 출퇴근하는 데야 왜 더욱 아니랴.

옛날 다니던 회사의 사장님. 아무리 늦은 새벽에 들어가셔도 문 앞에서 이제 집으로 들어간다, 하고 늘 말씀을 하셨다. 이제부터는 사장이 아니라 일개 가장일 따름이라고 늘 최면을 거셨다. 어린 날에 그 말씀은 내게 있어 본 받아야 할 훌륭한 습관처럼 느껴졌다. 다른 환경, 다른 세계, 혹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 앞에서 분별을 갖는 찰나의 시간은 꽤 중요하지 않나. 그런 까닭일까. 나도 팀과 연습을 할 때 연습실 문 앞에서 마음을 다잡고 들어오라고 말하곤 한다. 온갖 잡사를 내려놓고 연습실에서만큼은 집중해 달라는 의미다. 나라고 매일 되겠나. 하지만 그러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이 회전문은 내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될 환경을 알아서 만들어주었다. 그 문에서만큼은 한 호흡을 내린 채 내부로 또는 밖으로 연결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얼마나 지혜로운 세팅인가.

문득 불편한 건축이 모토라고 말하던 유명한 건축가가 생각난다. 가당키나 한가. 누구나 편안한 집과 가구를 추구하지 않던가. 불편한 게 철학이라니.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보니 꽤나 심오한 삶의 관점이 엿보인다. 벨이 없으니 문을 두드리며 안에 계세요, 해야 하고 안에서는 밖에 누구세요, 하며 나와서 반겨야 한다. 엘리베이터도 없으니 계단을 걸어 올라야 하고 의자는 각이 져서 불편하고 수도꼭지도 번거롭게 돌려야 된다. 사람이 사람을 반기는 방식이 살아있고 물과 전기를 소비할 때도 뚜렷하게 노동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무심결에라도 익숙한 것들이 괜히 소중해진다. 반드시 진보된 편리만이 능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불편해하는 불편들은 어쩌면 우리를 다시 리셋하라는 장치나 계시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편리함에 취하지 않아도 상쾌하다. 그래서일까. 오늘 연습실을 들어가다가 일부러 차를 멀찍이 주차했다. 가까이에도 물론 자리가 있었지만 괜히 그러고 싶었다. 경계 앞에서 누리는 찰나의 호흡조절, 재미 삼아서라도 즐겨보시라. 3초면 충분하다.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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