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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고문이라도 행복했는데… 2년 남았네요 ㅠㅠ

입력
2015.06.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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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비·식대·생활비 월 70만~80만… 큰 맘 먹고 고시촌 와도 비용 부담

부모에 손 못 벌려 어쩔수 없이 알바

한 해 등록금 수천만원 드는 로스쿨 진학은 애초 꿈도 못 꿔

17일 ‘신림동 고시촌’으로 더 잘 알려진 서울 관악구 대학동의 한 식당. 점심식사 시간인 낮 12시가 가까워지자 허기진 고시생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 식당은 7~8가지 밑반찬에 국과 과일을 양껏 먹을 수 있는 고시식당으로 인기가 많은 곳. 식당 홀에 줄지어 제육볶음과 나물, 김치를 담아내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주방도 정신 없이 바빠졌다.

두건을 쓰고 앞치마를 두른 식당이모들 뒤로 175㎝ 키에 다소 마른 체형의 강한수(가명ㆍ30)씨가 보였다. 푸른 색 앞치마와 빨간 고무장갑, 검정색 고무장화를 신은 그가 선 곳은 주방 한 켠의 싱크대. 이제 막 식사를 마친 이들이 두고 간 접시 10여장이 한수씨 앞에 놓였다. 비누거품이 가득 뭍은 수세미로 접시를 깨끗이 문질러 닦고 나니 또 다른 접시 수십장이 배달됐다. 한수씨의 일은 시작 3시간 만에 식당 잔반통 옮기는 일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그는 그제서야 다른 식당 직원들과 함께 늦은 점심식사를 한 후 식당을 나섰다. 오후 2시 40분이었다.

“저도 사법시험 준비하는 고시생이에요.” 식당 밖 입구에서 만난 한수씨가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고 말했다. 주방 일이 힘에 부쳤는지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손 바닥엔 주부습진 흔적이 한가득이다. 한창 공부할 시간인 오후 시간을 할애해서 주방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를 묻는 기자를 향해 한수씨의 씁쓸하면서도 싸늘한 웃음이 날아들었다. 그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며 “고시식당 주방 아르바이트 시급이 6,000원인데, 점심ㆍ저녁 하루에 두 번 일주일에 5일 일하면 한 달에 90만원 정도 벌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로 5년차 사시준비생인 그는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자라고 대학까지 그곳에서 마친 지역토박이다. 수도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건 어려운 가계 형편 탓이었다. 초등학교 근처에서 작은 떡볶이집을 운영하는 그의 부모는 아들의 서울 ‘유학’ 비용을 댈 능력이 없었다. 한수씨는 수도권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성적이 충분했음에도 한 마디 불평 없이 집에서 가까운 국립대를 선택했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키워온 법조인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고 고민 끝에 사법시험 준비를 결정, 2010년 서울 땅을 밟았다.

고시생들은 사법시험 폐지로 공정한 경쟁의 기회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고시전문 헌책방 앞을 지나는 고시생의 모습이 애잔해 보인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고시생들은 사법시험 폐지로 공정한 경쟁의 기회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고시전문 헌책방 앞을 지나는 고시생의 모습이 애잔해 보인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독하게 마음 먹고 상경했지만, 한수씨에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회당 2만3,000원으로 과목에 따라 20회 이상의 강의를 수강해야 하는 학원비, 월세 30만원에 식대까지 합치면 아껴 써도 평균 70만~80만원을 요했다. 부모님도 아들의 도전에 생활비를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늘 돈이 부족했다. 한수씨는 “부모님께 생활비를 더 보태달라 말씀드릴 수 없었다. 고시식당 주방 아르바이트는 한 달에 15만~20만원인 식대도 아낄 수 있어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주방 아르바이트는 주로 오전과 저녁에 있는 학원 수업시간도 피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는 “과외 아르바이트의 경우 학생들이 주로 저녁시간을 원해 시간활용에 제약이 있는 데다, 준비를 하려면 수학 등 학과 공부를 따로 해놔야 하는 부담이 있다”며 “개인적으론 지방대 출신이라 과외도 잘 구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영한(가명ㆍ28)씨와 오석민(가명ㆍ31)씨도 아르바이트와 수험생활을 병행하는 사시준비생이다. 이들 역시 짧은 시간에 일을 몰아서 할 수 있고 시급 높은 아르바이트를 찾았다. 영한씨는 일주일에 2~3차례 경기도에 있는 한 물류센터에서 택배 일을 한다. 지난 5개월간 매일 했던 일이지만, 2주 전 몸살감기를 크게 앓고 난 후론 횟수를 줄였다. 그것도 영한씨를 오래 봐온 현장소장님의 배려가 있어 가능했다. 오후 6시부터 시작해 4시간 동안 일하는데, 시간당 6,000원을 받고 있다. 영한씨는 이 돈으로 학원비를 보탰다. 석민씨는 주말을 이용해 일당 6만원의 일용직 노동을 한다. 주로 소규모 원룸빌딩 공사현장서 건축자재를 나르는 일을 하고 있다. 6년차 사시준비생인 그는 평일 시간을 아끼기 위해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이들 세 사람 모두 로스쿨 제도 도입으로 2017년 사법시험이 폐지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사시준비를 택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가계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사시 합격인원이 1,000명에서 2015년 올해 150명까지 줄어드는 등 합격률도 현저하게 낮아졌지만, 수천만원의 등록금이 필요한 로스쿨 진학은 애당초 이들의 선택지에 오를 수 없었다.

팍팍한 생활로 지칠 법도 하건만, 이들은 오히려 “사법시험이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계속 법조인의 꿈을 꾸도록 사법시험 폐지를 막아달라”고 말했다. 수험생활 4년차인 석민씨는 “희망이 있어 고생을 견딜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로스쿨 진학이 법조인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면, 수험생활을 이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영한씨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법조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잔혹하다”며 “빈부 차별 없이 모두에게 공정한 법 집행을 위해선 빈부에 영향받지 않는 법조인 선발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는 오는 24일부터 나흘간 치러지는 사법시험 2차 시험을 앞두고 있다. 한수씨와 영한씨는 거의 매년 2차 시험을 치러왔다. 남은 기회는 올해를 포함해 총 3회. 합격의지를 다지면서도 이대로 2017년을 맞을까 두렵기만 하다. “불합격의 실망감보다 기회박탈의 좌절감이 더 무섭네요.” 학원으로 발길을 재촉하던 한수씨가 담배 한 개피를 더 꺼내 물었다.

김관진기자 spiri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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