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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메르스 풍경과 2006 '괴물'의 추억

입력
2015.06.1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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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괴물'의 한 장면.
영화 '괴물'의 한 장면.

마스크 쓴 사람들이 퇴근길 횡단보도 앞에 선다. 비가 온 거리 물웅덩이에 누군가 가래를 내뱉자 사람들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다. 차가 지나며 물이 튀자 사람들은 기겁을 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역병에 대한 풍문으로 서울 도심은 공포로 가득하다.

9년 전 개봉해 1,200만 관객을 불러들인 한국영화 ‘괴물’(감독 봉준호)의 한 장면이다. 공교롭게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에 사로잡힌 지금 한반도 남부의 모습과 공명한다.

엄밀히 말하면 ‘괴물’은 바이러스에 대한 영화는 아니다. 한국 정부가 한강의 괴물 때문에 괴질이 번지고 있다고 맹신하면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상황을 이야기의 연료로 삼는다. 병균 확산 방지에 대한 정부의 병적인 집착이 만들어낸 블랙유머가 스크린을 장악한다. 방호복으로 무장한 한 정부 관계자가 합동장례식장에 나타나 감염이 의심되는 유족을 강제 격리시킬 때 관객은 국가의 묻지마 폭력을 목격한다. 주인공 강두(송강호)는 제대로 된 검사도 없이 감염자로 분류되고 실험대상으로까지 전락한다.

‘괴물’은 필요한 곳에선 정작 작동하지 않는 정부의 부조리한 면모를 비꼰다. 강두의 가족은 딸 현서(고아성)를 찾기 위해 스스로 총을 들고, 결국 무지렁이 같은 서민이 괴물을 퇴치한다. 영화는 자기 이익에만 충실한 미국의 민낯을 보여주기도 한다. ‘괴물’은 국가는 무엇이며 미국은 또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반문하며 당대 사회상과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한다. 인구의 4분의 1이상이 이 영화에 열광한 이유 중 하나다.

‘괴물’을 떠올리면 9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국은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괴물’ 속 정부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강력 대응으로 일관한다. 상황을 오판해 메르스 사태를 키운 현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의 무능은 영화가 소재로 삼을 만큼 일상적인 것이니 메르스 사태는 그저 운이 나빠 벌어진 일이라고 위안 아닌 위안을 삼아야 할까?

‘괴물’은 강두가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으로 맺는다. 밥을 먹다 강두는 뉴스를 방송하던 TV 전원을 발가락으로 눌러 끈다. 정부든 미디어든 기존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지금 국민들의 심정과 다르지 않다. 강두는 딸이 살려낸 거리의 아이와 함께 생활한다. 새롭게 만들어진 가족을 보며 관객들은 엷은 희망을 그나마 품는다. 2015년 한국 사회에서는 언감생심인 장면이다. 어느덧 어두운 오락영화 ‘괴물’이 부러운, 각자도생의 사회가 됐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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