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성향의 자유주의 사상가 이사야 벌린이 양차 대전 시기의 국제사회를 비교한 적이 있다. 그는 문학의 질이 한 시대 지적ㆍ윤리적 생명력을 가늠케 하는 신뢰할 만한 지표라 며, 1차대전(1914~18)이 2차대전(39~45년)보다 전쟁의 양상은 더 참혹했지만 문화적 생명력은 더 강했다고 평했다. 그 근거로 그는 상대적으로 우람했던 1차대전기의 작가들, 버나드 쇼, 오손 웰스, 키플링, 하우프만, 지드, 체스터튼, 아놀드 베네트,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E.M 포스터, T.S 엘리어트, 폴 발레리 등을 열거했다. 그런 뒤 “하지만 2차대전기가 더욱 빛났던 것은 전시의 정치 지도자들이었다”고 썼다. 차르보다는 스탈린이, 카이저보다는 히틀러가, 빅토르 에마뉴엘보다는 무솔리니가, 윌슨보다는 루스벨트가, 로이드 조지보다는 처칠이, 선악을 떠나, 큰 인물이었다는 거였다. 역사 속 영웅과 악당의 지위는 그들이 연루된 사건의 크기뿐 아니라 타고난 그릇(intrinsic human size)에 좌우된다고도 썼다.
그는 ‘처칠과 루스벨트’라는 저 칼럼에서 영ㆍ미의 두 정치인을 동등하게 떠받들었다. 하지만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루스벨트가 유탄 하나 날아들지 않은 미 본토에 있었고, 처칠은 언제 나치의 폭격과 V-1 순항미사일이 머리 위로 떨어질지 모르는 전장에, 그것도 항복을 종용하는 의원들 속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치 독일은 1940년 6월 14일 프랑스 파리를 점령했고, 유럽의 민주주의는 영국 하나로 왜소해졌다. 영국의 전력 역시 독일에 댈 게 아니었다. 한 달 전인 5월 13일, 윈스턴 처칠이 전시내각 수상 수락 연설에서 “내가 조국에 바칠 수 있는 것은 피와 노역(toil), 눈물, 땀밖에 없다”고 한 건 전시 영국의 처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6월 18일, 처칠은 영국 하원에서 저 유명한 항독 연설을 한다.
“(…)이제 영국의 전투가 시작되려 합니다. 그 전투에 기독교 문명의 생사가 달려 있습니다. 거기 우리의 일상과 체제와 제국의 영속성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긴다면 유럽은 자유를 되찾게 될 것이고 우리의 삶은 더 밝고 높고 광활한 곳으로 전진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진다면 이 세계는 우리가 소중히 해온 모든 것들과 함께 새로운 암흑의 심연으로 가라앉을 것입니다.(…) 만일 대영제국과 연방이 천 년을 더 간다면 그 후손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그들의 최상의 시간이었다(This was their finest hour)고.” 의원들의 단합을 촉구하며 그는 “과거와 현재를 싸우게 두면 미래를 잃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절박한 위기 앞에서 천 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현재를 최상의 시간이라 진단할 수 있는 역사의식과 정치감각. 그게 벌린이 말한 그릇일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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