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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의 자만, 워터게이트 수렁 파다

입력
2015.06.1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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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9일 백악관을 떠나는 닉슨. AP뉴스
1974년 8월 9일 백악관을 떠나는 닉슨. AP뉴스

사건(사고) 자체보다 거기 대응하는 과정이 더 큰 사건(사고)을 낳는 예는 드물지 않다. 그런 점에서, 1972년 6월 17일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다는 건 반만 옳다. 그날 미국 워싱턴DC 워터게이트 빌딩에서 도청장치가 발견된 것은 맞고, 거기 입주해 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불법 침입한 괴한 5명이 현장에서 체포된 것도 맞다. 하지만 닉슨 행정부가 불법 도청을 시작한 건 3주 전이었고, 그게 20세기 최대의 정치 스캔들이 된 것은 워싱턴포스트 기자 밥 우드워드가 사건 배후로 백악관을 지목한 뒤부터였다. 유권자들은 닉슨의 부정보다, 자신의 부정을 감추기 위해 거듭한 그의 거짓말과 권력 사유화에 분노했다.

사실 74년 닉슨의 재선은 낙관적이었고, 실제로 그는 매사추세츠 주를 제외한 모든 주(49개주)에서 민주당 조지 맥거번에 승리했다. 훗날 결과론자들은 워터게이트 도청이 불필요했고, 별 쓸모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 음모론자들은 에드거 후버 사후 정보권력 재편 과정에서 빚어진 FBI와 CIA의 갈등, 그리고 FBI 후임 국장 인선에서 배제된 마크 펠트 당시 부국장(그는 2005년 자신이 제보자였다고 고백했다)의 기획에 닉슨이 희생됐다고 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의도가 아니라 행위였다.

닉슨은 오만했고, 그 오만으로 스스로 비루해졌다. 그는 자신의 캠프 연루 사실을 부인했고, 그 뒤 인지 사실을 부인했다. 결정적 증거였던 대통령 집무실 녹음 테이프 공개를 거부했고, 법무장관에게 특별검사 해임을 명령했다. 법무장관은 대통령 명령을 거부하며 사임했고, 법무 차관도 그 명령에 사표로 맞섰다. 닉슨은 73년 6 월 23일 내용 일부가 삭제된 테이프를 공개했고, 비서의 실수로 훼손됐다고 해명했다. 그 역시 거짓임이 드러났다. 74년 7월 28~30일 하원 사법위원회의 탄핵권고 표결은 3차(사법 방해, 권력 남용, 의사 모독) 모두 가결됐고, 닉슨은 8월 8일 사퇴의사를 밝혔다. 그는 변호사 자격도 박탈당했다.

닉슨은 냉전 종식의 서막을 연 외교 대통령이었다. 키신저-저우언라이와 회담(71년)도, 최초 미중 미소 정상회담(72년)도 그의 작품이었다. 전후 경제 호황이 끝났고, 베트남 전비로 거덜난 재정으로는 군비경쟁을 지속할 수 없던 때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70년대의 미국과 세계는 보다 험난한 세월을 보내야 했을지 모른다. 닉슨도 그리 믿었고, 그 과도한 자기확신이 워터게이트의 수렁을 파게 했을지 모른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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