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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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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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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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할권 조항 정치적 물타기, 北을 백지 상태로 남겨 두려는 일본

대한민국 정통성 확인하려는 남한… 1948년 12월 유엔결의 明記로 타협

양 측 해석 제각각 달라… 유엔 감시 아래 선거 실시한 지역

내용은 빼고 유일·합법만 강조, 北의 對日청구권 여전히 살아 있어

1965년 2월17일 한국을 방문한 시이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왼쪽)이 이동원 외무부장관의 영접을 받고 있다. 이때 이들의 정치적 담판에 의해 한일기본조약이 합의됐다고 한일 양국의 외교문서는 전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총회 결의 제195(Ⅲ)에서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 1965년 6월22일 체결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 제3조에 해당하는 이른바 ‘관할권 조항’이다. 이에 대해 1965년 8월13일의 국회 비준동의안 설명에서 이동원 당시 외무부장관은 “한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것을 일본으로 하여금 명확하게 확인시킴으로써 …… 일본이 양면(兩面)정책을 펼칠 가능성을 봉쇄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북한은 ‘불법단체’가 되고, 기본조약이 존재하는 한 일본이 북한과 국교를 맺는 것이 불가능하며 설혹 맺더라도 유일한 합법정부인 한국의 동의 혹은 이해가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이동원의 설명이 분단체제하에서 북한과 정통성을 다투던 시대상을 반영한 견강부회(牽强附會), 지록위마(指鹿爲馬)였다는 것은 해당 조문의 내용을 보더라도, 이후의 북일관계나 한국 정부의 재해석을 보더라도 명백하다.

한국의 유일합법성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1962년 11월12일 도쿄의 일본 외무성에서 열린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 간의 회담 이후이다. 일본의 경제지원 자금으로 청구권 문제를 봉인한 것으로 유명한 이 자리에서 김 부장은 기본조약을 통해 한일 간의 ‘과거의 사태’를 청산함과 동시에 한국이 유일한 합법정권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두자고 제안했다. 이어 그 해 12월 속개된 제6차 한일회담 제2차 정치회담에서 한국측은 영토조항을 별도로 설정해 현재 행정적 지배하에 있는 지역(남한)은 물론이고 ‘앞으로 행정적 지배에 들어올 지역’에도 기본조약이 효력을 미치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후자는 당연히 북한을 의미한다, 한국측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물론 한국이 전체 한반도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점을 부각시켜 향후에 이뤄질지도 모를 북일 교섭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생각은 확고했다. 정치적 권위가 엄연히 존재하는 북한을 부정한 채 한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조약을 한국과 맺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1952년 중화민국과 강화조약을 맺을 때도 교환공문을 통해 조약이 대만 정부의 지배하에 있는 영역에서만 적용된다고 규정해 중국 대륙에 대해선 ‘백지’ 상태로 남겨둔 전례가 있다. 일본 정부는 특히 국내정치적으로도 한국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당시 야당이던 사회당과 공산당 그리고 혁신계열의 시민단체 등은 남한과의 단독 수교가 남북분단을 고착시킬 뿐 아니라 한국만의 군사력을 강화시켜 결과적으로 한국의 대북 강경책에 일본이 말려들 수 있다며 반대했다.

북한을 ‘백지’ 상태로 남겨둬야 한다는 일본측 입장은 청구권이나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 문제에 대해서도 반영됐다. 한국의 대일 청구권 요구액을 계산하면서 일본 외무성과 대장성은 가령 우편저금에 대해서는 남북한의 인구비례를 기준으로 각각 70 대 30을, 징용노무자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남한 출신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한국에 95%를 북한에 5%를 부여하는 산출 방법을 적용했다. 일본측은 또 휴전선을 경계로 정치적 권력이 양존하는데다 남북한을 각각 지지하는 재일조선인이 있다는 현실을 지적하며, 재일조선인을 모두 대한민국 국민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한국측의 요구를 거부했다.

유일합법성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절충은 1964년 말부터 시작되는 기본조약 조문 교섭에서 본격화한다. 이때 일본측이 들고 나온 것이 바로 1948년 12월12일 유엔 총회가 채택한 결의안 제195호(Ⅲ)이다. 일본측이 유엔결의의 명기를 요구한 것은 물론, 한국이 유엔의 감시 하에 이뤄진 선거를 거쳐 수립된 합법정부인 것은 틀림이 없으나 한국 정부의 영향권이 선거가 실시된 한반도의 남측에 한정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2000년 이전까지의 모든 교과서와 2013년 ‘38도선 이남’이라는 표현을 삭제하라는 교육부의 권고를 수용한 최근의 근현대사 교과서는 유엔총회 결의안 제195호(Ⅲ)를 근거로 ‘대한민국은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정의해왔다. 하지만 결의안에서 유엔이 승인한 대한민국은 유엔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서 선거가 실시된 ‘그 지역(that part)’에서 관할권을 갖는 정부였다는 것은 결의안의 영문 표현을 보면 명백한 사실이다. 이는 우리 헌법 3조(‘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다’)와 충돌하지만, 한국 정부는 거두절미하고 결의안에 언급된 ‘유일’과 ‘합법’만을 강조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추구해온 것이다.

한국이 유엔결의안을 중요시해온 만큼 기본조약에 이를 명시하자는 일본측의 요구를 마냥 거부할 수도 없었다. 이에 따라 1965년 1월25일 박정희 정부가 협상단에 내린 훈령은 “유엔총회 결의안 제195호(Ⅲ)만 언급하되 그 결의안의 모든 내용을 인용하지 않는 표현”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국민들이 영어로 된 유엔결의안을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는 한 유일합법성의 범위를 알 수 없기에 당장 내용을 알 수 없는 결의안의 제목만 언급해 일본측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조문상으로는 한국의 유일합법성이 돋보이도록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측도 유엔결의안만 명시된다면 실질적으로 한국의 관할권을 남한으로 제한되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판단, 한국측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유일합법성을 조금이라도 부각시키려는 한국측과 이를 무마하려는 일본측 간에 추가적으로 정치적인 ‘물타기’ 과정을 거친 끝에 기본조약 제3조가 완성된 것이다.

당연히 이 조항에 대한 한일 양국의 해석은 천양지차였다. 한국 정부는 이동원 외교부장관의 말처럼 이 조항이 대한민국의 유일합법성을 확인한 것으로 설명한 반면, 일본 정부는 유엔총회 결의안 제195호(Ⅲ)를 명시함으로써 기본조약의 적용 범위를 한반도 이남으로 분명히 제한했다고 인식했다. 1965년 10월에 열린 일본 국회의 한일조약 특별위원회에서 일본 정부는 이 조항으로써 “북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는 점이 보다 확실해졌다”는 공식 입장을 내놨다. 더욱이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은 “한국의 대일 청구권 혹은 재산이라는 것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명백히 한국 및 한국민이라고 쓰고 있다. 따라서 청구권 문제에서 북한은 제외되어 있다”고 밝혀 북일 간에 청구권 문제가 남아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1965년 12월 일본 참의원에서 집권 자민당이 한일조약에 대한 동의절차를 강행하자 야당 의원들이 연단으로 몰려가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당시 ‘굴욕외교, 대일 저자세 외교’를 주장하며 한일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한국내의 분위기와는 달리 주로 냉전적 관점에서 북한을 제외하고 한국과 단독으로 수교하는데 대해 반대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렇게 볼 때 한일조약의 체결이 일본 정부에게 한반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국가, 즉 북한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또는 북한과의 관계를 먼 장래까지 구속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본 정부의 의도는 한일기본조약의 적용 범위를 38도선 이남의 한국에 한정시켜 북한과의 관계를 ‘백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었고, 이는 조약 내용을 통해 실질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더욱이 한국 정부가 주장한 ‘유일합법성’은 “우방국이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는 경우 이에 협력하겠다”고 밝힌 1988년 노태우 대통의 7·7선언과 90년대 초반의 남북 기본합의서의 채택에 이어, 1991년 9월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59개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유엔에 가입하면서 원천적으로 붕괴됐다고 볼 수 있다.

북한 또한 기본조약 3조의 의미를 평가절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조선 괴뢰 정권을 가리켜 조선에 있어서의 무슨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운운하며 자기들의 범죄적 흑막 외교에 합법성의 외피를 씌워보려고 시도하였다. 그 주장의 논거로서 유엔총회의 결정까지 들고 나왔지만 그것은 미제의 강요에 의해 조작된 것이며, 유엔은 어느 한 정권의 합법성 여부를 승인하거나 판결하는 결제기관이 아니다.” 1965년 2월23일 발표한 ‘정부 성명’에서 북한은 이렇게 기본조약의 ‘관할권 조항’을 맹비난했다.

흥미로운 것은 1991년 일본과 북한이 국교정상화를 추진하는 와중에 한국 정부의 국제법적 지위가 다시 논쟁거리가 됐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일본은 한일조약과의 정합성을 확보한다는 관점에서 북한의 관할권 범위를 휴전선 이북으로 제한하는 규정을 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일본으로선 이렇게 해야 한반도 전체와의 관계정상화를 완성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조선은 하나’이고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한 관계’인 만큼 분단국가를 전제로 하는 표현은 곤란하다고 맞섰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한반도에서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고 스스로가 통일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온 북한으로선 현재의 관할권이 명시되어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여하간 분명한 점은 기본조약에서 한국은 실질적으로 한반도에서의 ‘유일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했으며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규정된 ‘코리아’의 절반인 한국과만 화해를 한 셈이어서 나머지 절반인 북한에 대해서도 국교정상화를 통해 청구권 문제 등을 해결해야 할 ‘의무’를 안고 있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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