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 출석,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이른바 ‘척하면 척’ 발언에 “시장에 영향을 주는 사람은 금리 발언을 자제해야 한다”고 응수한 일이 비중 있게 보도됐었는데 그새 상황은 많이도 변했다. 한달 간의 기준금리를 책정하는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월례회의는 이제 회의 전후로 정부와 정치권의 무람없는 훈수와 뒷공론으로 무성한 ‘정치경제적’ 이벤트가 됐다.
총선을 앞둔 3월 금통위 회의 땐 여당 대표가 정부와 함께 전면에 나서 금리 인하를 밀어붙이더니, 이달 금통위 회의(11일) 직전엔 박근혜 대통령이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발생에 따른 경제적 파장이 최소화되도록 관계부처가 모든 선제적 조치를 취해달라”고 했다. 대통령까지 훈수를 두는 판이니 “정치적 압력이 한은을 금리인하로 이끌었다”(바클레이즈)는 분석이 나올 법하다.
‘한국은행의 자주성은 존중되어야 한다’(한국은행법 제3조)는 법조문을 무색하게 하는 말잔치는 금통위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뒷공론 모드로 전환되는데, 금리 동결과 인하 간 거친 가부 논쟁만 있을 뿐 금리 결정 요인에 대한 찬찬한 분석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기준금리가 연 1.50%까지 떨어진 이달은 여야 내부에서조차 찬반이 엇갈리며 백가쟁명을 방불케 하고 있다. 금통위 회의 다음날인 지난 12일 한은 창립 65주년 기념행사에선 정희수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장이 축사 도중 “대한민국 경제의 지속성장을 잘 지켜달라고 한은에 독립성을 줬는데 항간의 기대에 비춰 실망스럽다”고 했다. 진의는 알쏭달쏭했지만, 어쨌든 ‘생일날’까지 지청구를 듣는 처지가 된 한은 총재는 굳은 입매로 천장을 응시했다.
시장은 이제 통화정책 향방을 가늠하려 한은 아닌 정부를 바라본다. 통화정책 수장의 발언을 아무리 뜯어보아봤자 금리가 어디로 튈지 알기 힘든 탓이다. 한은이 올해 금리를 내렸던 3월과 6월, 금융투자협회 설문에 응한 채권시장 전문가 92%와 71%는 각각 금리 동결을 점쳤다. 사실 이 총재가 지난해 4월 취임 이래 금리가 내려갈 것이라고 속 시원한 신호를 보낸 일은 별로 없었다. 그가 금통위 기자회견을 할 때마다 외환시장에선 원ㆍ달러 환율 급락(원화 강세)이 되풀이되고 있는데, 이는 말할 필요 없이 이 총재가 금리가 더는 내려갈 일 없을 것이란 매파적(통화긴축 선호) 메시지를 보냈다고 시장이 여긴 까닭이다.
전망능력 부족과 같은 내부 요인도 있겠지만, 한은의 권위 실추는 일차적으로 정부 탓이다. 뒤에서 팔을 비트는 수준을 넘어 대놓고 금리 인하를 요구하는 식이니, 한은이 제 뜻으로 금리를 내린다 해도 우스운 꼴을 당할 수밖에 없다. 1997년 외환위기 이래 한은법 개정으로 중앙은행으로서 독립성이 대폭 강화되긴 했지만, 한은은 대정부 관계에서 여전히 수세적이다. 한은이 임직원 월급을 주려면 기획재정부 장관의 예산 승인이 필요하다(한은법 98조). 통화신용정책은 정부 경제정책과 조화를 이루도록 규정돼 있고(4조), 기재부 장관은 금통위에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92조). 금통위원 임기(4년)가 임명권자인 대통령(5년)보다 짧은 점도 정부가 한은을 움직일 지렛대가 될 수 있다.
이 총재는 이달 금통위 기자회견 때도 “금통위가 독자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달라”고 정부에 호소했다. 그런데 문득, 정부만 각성하면 충분한 걸까, 의문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폭증하는 가계부채, 금리를 내려도 해빙 기미 없는 기업투자, 중국의 수입대체전략에 휘청대는 수출, 적게 태어나도 취업할 자리가 없는 청년층, 긴 노년기를 견디려 지금 지갑을 닫아버린 중장년층…. 구조변화를 동반한 이 시대의 경제적 난제들을,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파이터(물가 억제)로 분투하던 고물가ㆍ고성장 시대의 정책적 유산으로 대처하는 일은 얼마나 유효할까. 가당키나 한 걸까.
이훈성 경제부 기자 hs0213@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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