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라는 단어는 누가 입에 담아도 불편함이 없다. 꼬마 때나 지금이나 어떤 도덕적 질서나 원칙으로 따져 옳고 그름을 살필 여지가 옅은 말이다. 본능적이기도, 절대적이기도, 그 자체로 완전무결하기도 하다. 그러나 ‘아빠’는 다르다. 남자의 경우 더 그렇지 않을까. 내가 ‘아빠’를 ‘아버지’라 처음 부른 건 갓 스물 무렵이었다. 내 의지나 판단이 아니었다. 어느 선배 집에서 부친과 통화를 하다가 버릇대로 ‘아빠’라 불렀다가 혼이 났었다. 선배는 쭈뼛거림과 응석이 뒤섞인 말투로 ‘아빠’를 부르는 내게 매우 심각하고 진지한 지청구를 늘어놓았다. 그 다음부터 내겐 ‘아빠’가 ‘아버지’가 되었다. 선배의 위엄 때문인지 뼈저린 자각이 있었는지 이제 와선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그 이후로 ‘아버지’가 된 ‘아빠’는 사춘기 때보다 더 눈 마주치기 어려운 더 ‘먼 곳의 어른’이 되었다. 그게 불혹을 넘긴 지금까지 이어진다. ‘아버지’란 단어가 가진 도덕적, 사회적 함의를 지레 의식하는 건 아니라 여긴다. 그럼에도 모종의 정겨움과 애정을 담아 무슨 말을 건네려 머뭇거리다가 이내 ‘아버지’란 단어 앞에서 감정이 굳어버리는 경우가 하루 이틀 아니다. 한번 교정된 ‘아버지’를 다시 ‘아빠’라 부르는 건 가능한 일일까. 그래도 일단, 불러본다. 아빠, 아픈 데 없어요? ‘아버지’는 과연 웃으실까 화를 내실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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