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만 빼고 다 바꾼 유니버설발레단의 ‘그램 머피의 지젤’은 메르스 공포를 감수하고 볼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서사를 끌고 가는 무대 메커니즘이나 전체적인 완성도에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국내 민간 발레단의 높은 창작 수준을 보여줬다. 음악, 의상, 무용수의 동작은 웬만한 해외 무용팀보다 세련됐다.
13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세계 초연한 ‘그램 머피의 지젤’은 현악기 활을 긁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로 무대를 연 음악부터, 패션쇼 런웨이를 연상시키는 감각적인 의상, 토슈즈를 벗고 무대를 뛰는 무용수들의 춤과 시종일관 새침한 지젤의 표정까지, 원작 줄거리를 빼고 전부 바꿨다. 1841년 첫 선을 보인 ‘지젤’은 발레리나들에게‘꿈의 작품’으로 불린다. 순진한 소녀부터 남자의 배신에 치를 떠는 미치광이, 처녀귀신까지 드라마틱한 캐릭터를 한 무대에서 선보일 수 있기 때문. 사랑에 빠져도, 배신에 치를 떨어도, 죽어 영혼이 돼 옛 사랑과 재회를 해도 언제나 왈츠만 추는 지젤은 청순가련의 대명사였고, 이 작품은 낭만발레의 진수로 자리잡았다.
호주 출신의 안무가 그램 머피는 지젤이 왈츠만 추게 만드는 음악부터 바꿨다. 영화음악가 크리스토퍼 고든은 시골처녀 지젤과 귀족총각 알브레히트의 만남을 서로 다른 두 세계의 만남으로 해석해 지젤의 세계를 타악기 소리로, 알브레히트의 세계를 금속악기로 표현했다. 때문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1막 중반 장은, 사랑의 하모니가 아니라 격렬한 음의 충돌로 연출됐다. 장구, 꽹과리, 징 등 전통 타악기가 다른 클래식 악기와 어울려 엇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같은 한국 장단을 연주해 독특한 질감을 선사했다. 무대에도 한국적 요소를 넣어 윌리들의 세계를 묘사한 2막 무대는 한국 소나무를 연상시키는 굽은 나무들이 얽힌 모습을 배경으로 선보였다.
원작 지젤은 무용수 몸짓만 봐도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게 풍성한 마임이 나온다. 신작에선 이를 대폭 줄여 춤으로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한다. 동작이 크고 빨라 한층 강렬하게 다가온다. 무용수보다 마이미스트에 가까웠던 알브레히트의 약혼자 바틸다, 지젤의 엄마는 이 작품에서 춤꾼으로 거듭났다.
원작에 없던 지젤 부모와 윌리의 여왕 미르타의 삼각관계는 신작에서 처음 선보이는 설정이다. 지젤 부모의 2인무, 알브레히트와 약혼자 바틸다, 지젤과 지젤을 짝사랑 하는 힐라리온의 4인무도 이번 작품에서 처음 선보였다. 원작의 백미인 윌리들의 춤은 우아한 3열 종대 군무에서 원 모양의 군무로 바뀌었다. 2막에서 토슈즈를 갖춰 신은 지젤과 미르타가 이 원을 넘나들다가 일렬 종대로 합체한 윌리들을 다리 건너듯 올라선 장면은 감각적인 모던 발레다웠다.
아쉬움도 남겼다. 원작과 같은 시간(쉬는 시간 제외 100분) 내에 지젤 이전 시절의 이야기를 덧붙인 작품을, 마임까지 대폭 줄여 무대 올리다 보니 바뀐 맥락과 캐릭터를 관객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젤 알브레히트 등 주역들을 트리플캐스팅해 무대 리허설 기회가 적다보니 음악과 무용수 동작이 어긋나고, 지젤 주역 황혜민이 2막에서 미끄러지는 실수도 이어졌다.
공연 첫날 객석 점유율은 77%.‘메르스 리스크’에도 극장 주변은 공연 수십 분 전부터 북적거렸다. 초연을 ‘영접한’ 관객들의 평은 엇갈렸지만 결론은 하나로 수렴됐다.“이게 지젤이야?”
17일까지. (070)7124-1737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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