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원 개인전 '고궁보월'
유화를 쓰는 서양화가이면서도 민화의 화법으로 동물을 그려 온 사석원이 서울 고궁을 새로운 소재로 삼았다. 서울 신당동에서 태어나 홍제동 아현동 장충동 등에서 살았던 사석원에게 도심 속 고궁은 익숙한 풍경이다. 어렸을 적 놀러 다니던 창경궁, 고등학생 때 스케치한 경복궁 향원정이 그의 기억 속에 각인돼 있다.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3년 만에 여는 개인전 ‘고궁보월(古宮步月)’에서 사석원은 역사 이야기가 담긴 풍경화를 보여준다. 전시 제목을 ‘고궁보월’이라 한 것도 옛 궁궐을 거니는 달빛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모든 것을 바라보고 기억하라는 상상에서 비롯됐다. 작가의 감정을 대신 표현하는 역할로 그림에서 빠지지 않았던 부엉이 호랑이 황소 당나귀 닭 등은 기존 작품에서 보였던 해학적인 표정을 거두고 역사의 매개자가 되어 경복궁과 창덕궁의 풍경에 새로운 감각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고궁 그리기는 그에게 새로운 도전이다. 그에게 마음의 고향은 학창 시절 방학마다 방문했던 포천의 외갓집이고, 여기서 만난 동물들에게서 “자연의 생명력과 생동감”을 동경하게 되면서 동물을 그리게 됐다. 사석원은 “동물이나 사람이 아닌 건물을 그리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다”면서도 “고궁의 비장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주는 감동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 ‘1776년 3월 창덕궁 후원’이 그렇다. 겨울이 지난 3월인데도 사석원이 상상한 창덕궁 후원의 풍경은 눈발로 가득하다. 쇠락해 가는 조선 후기의 비장하면서도 적막한 광경이다. 그 사이로 화려한 깃털을 뽐내는 두 마리의 부엉이가 날아 나무 위에 앉는다. 눈발 사이로 끝내 붉은 꽃을 피운 매화나무가 이들을 반긴다. 왕조의 운명을 바꿀 새 파수꾼이 등장한 것이다. 후기 조선을 중흥시킨 군주로 평가받는 정조가 즉위한 때가 바로 1776년 3월이다.
사석원은 정조가 “본받을 점이 많은 뛰어난 군주”라고 했다. 정조가 만들었던 학술기관 규장각을 묘사한 ‘창덕궁 규장각 호랑이’ 등 이번 전시작품 대부분이 정조를 위해 그린 것이다. “능력과 지혜도 있지만 무엇보다 정신력이 대단했어요. 먼 임지의 관리와 편지를 쓰면서 소통하는 등 노력하는 군주였습니다. 그가 20년만 더 살았어도 조선의 역사는 크게 변하지 않았을까요?”
정조 다음으로 많이 다룬 왕은 고종이다. 사석원은 고종이 “조선 왕조를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힘이 부족했다”고 했다. 서양식 건물인 덕수궁 석조전을 그리고 서양의 동물인 사자가 내려다보는 것으로 마무리한 ‘덕수궁 사자’가 특히 눈에 들어온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권을 강조하기 위해 서구 열강들의 공관과 가까운 자리에 석조전을 세우려 했지만 건물이 완공된 1910년 조선은 국권을 잃었다.
사석원은 동국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했기에 애초에 작가로서의 출발은 동양화가였다. 지금도 유화 물감을 쓰지만 일부러 동양화용 붓을 쓴다. 이 기법이 이번 전시회에 낸 작품에서는 고궁의 동양적인 미와 맞아 떨어졌다. 그는 “서양화와 한국화의 정확한 경계를 잘 모르겠다”며 “재료가 수묵이든 유화 물감이든 그림을 시작할 때 배웠던 대로 그리는 것 뿐”이라 말했다.
사석원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서울과 포천을 오가며 동물을 그린다. 서울 집에서는 토끼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그는 “동물이 짓는 다양한 표정을 통해 사람들의 삶에 야생의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다”며 “이번에는 비장한 표정이었지만 다음에는 또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7월 12일까지. (02)720-1020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