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를 묽게 탄 커피이다. 요즘처럼 때 이른 불볕더위가 기승이면 얼음을 잔뜩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제격이다. 얼음을 넣은 물에 에스프레소 샷을 부으면 진한 에스프레소가 천천히 물속으로 퍼져 나간다. 빨대로 젓지 않더라도 시간이 충분히 지나면 얼음마저 다 녹아 이제는 그냥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돼 버린다. 그 뒤로는 시간이 아무리 흐르더라도, 또는 아무리 열심히 빨대를 휘젓더라도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다시 물과 얼음과 에스프레소로 분리되지 않는다.
이는 이름도 거창한 ‘열역학 제2법칙’ 때문이지만, 우리가 경험적으로 다 아는 사실들이다. 자연현상에는 이처럼 일정한 방향성이 있다. 자연의 법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인간 세상도 거스를 수 없는 큰 법칙에 따라 돌아갔으면 하고 바라는 경우가 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마다 나는 물리계가 아닌 인간계의 ‘제2법칙’을 상상하곤 한다.
마침 오늘은 6ㆍ15 남북정상회담 공동성명이 나온 지 15년이 되는 날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군사위원장의 회담은 분단 이후 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었던 만큼 한반도 긴장완화와 남북관계 개선에 획기적인 돌파구를 마련했던 일대 사건이었다. 이산가족상봉과 개성공단 사업이 이어졌고 각종 민간교류도 활발해졌다. 이제는 남북관계가 역사를 거슬러 퇴행하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 기대했던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에스프레소가 물속을 퍼져 나가듯, 얼음이 녹아 아메리카노와 뒤섞여 버리듯, 그렇게 남북한이 평화와 화해로 얽히고설켜 누가 밖에서 아무리 휘젓더라도 다시 예전의 긴장상태로 돌아가지는 않으리라 기대했고 희망했다.
15년이 지난 지금의 한반도는 마치 아메리카노에서 물과 에스프레소가 분리되고 녹았던 얼음이 다시 각진 육면체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남북관계에서도 열역학 제2법칙 같은 원리가 작동할 수는 없었을까?
아직도 진정되지 않고 있는 메르스 사태도 마찬가지이다. 메르스보다 훨씬 전염성이 강한 사스를 완벽하게 방역했던 것이 무려 12년 전의 일이다. 작년 세월호 참사와 같은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위기 상황에 대한 만반의 대응태세를 갖춰도 시원찮을 판국에, 세계적인 방역모범사례조차 이어받기는커녕 완전히 무위로 되돌려버린 게 현 정부의 모습이다. 국가가 존재하는 일차적인 이유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라면, 이를 위한 국가의 방어기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발전하든가 아니면 적어도 현상유지는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제2법칙’이 작동해야 정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차이점은 있다. 물리계의 제2법칙은 우리 우주의 기본적인 성질인 반면 인간계의 제2법칙은 우리가 부단한 노력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가치에 가깝다. 이미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남북관계든 방역체계든 회복불능의 파국으로 치닫는 건 시간문제다.
이종필 고려대 연구교수ㆍ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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