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연기 파문은 정부 자업자득
한미관계의 건강성 점검하는 계기로
외교의 명확한 좌표 설정이 우선돼야
참 안타깝다.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연기 얘기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가 이렇게 일파만파 번져 우리의 가장 중요한 외교 행사인 한미 정상회담까지 치르지 못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외교적 손실임은 틀림없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사실 메르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정부가 가장 위급한 국면에 정상회담을 이유로 수뇌부를 대거 이끌고 집을 비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시지탄이나, 이제라도 과도한 공포와 괴담이 번지지 않도록 상황을 통제해 더 이상 국익의 훼손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청와대는 “메르스 사태 전념”을 방미 연기의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과정을 볼 때 청와대가 얼마만큼 의지를 갖고 대응해 나갈 수 있을 지 미덥지 않다.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한미 정상회담까지 연기하는 결단을 내리게 된 직접적 배경이 메르스가 아니라 민심이반이 우려될 정도로 악화한 여론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불행하게도 방미 연기 이후에도 메르스에 대처하는 정부의 모습에서 별반 달라진 면을 찾기 어렵다. 허둥대고, 책임전가하고, 대책본부 방문을 급조하는 식의 졸속ㆍ보여주기 행태가 여전하다. 대통령 방미까지 반대하면서 청와대와 정부에 기대했던 국민의 요구와는 아직도 거리가 멀다.
그럼 메르스에 비친 한미관계는 어떤가. 메르스 공포가 워낙 큰 이유도 있겠지만 한미 정상회담을 보는 여론의 냉소적 시각은 가볍게 지나치기 어렵다. 미국에 대한 신뢰가 흔들림 없고, 한미 정상회담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공감했다면 이런 분위기가 나왔을까.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국내정치에 한미 정상회담이 휘둘리는 상황은 그만큼 한미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이상신호일 수 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 대북제재 강화, 미일유착, 그리고 남중국해 사태에서 드러났듯 한국 정부를 줄 세우려는 미국의 노골적인 압박 등 우리의 국익에 반하거나 최소한 우리 외교에 족쇄를 채우려는 현안들이 건강한 대미관계를 가로막는 요인들이다.
한미 정상회담 연기를 놓고 미국과 일본 등 주변국에서는 벌써 이런 저런 얘기가 흘러나온다. ‘전염병 퇴치를 대미관계보다 우선시한다’ ‘지지율 만회를 위해 한미 정상회담을 이용한다’ ‘방미 연기가 아니라 사실상 방미 취소다’ 등이다. 세계보건기구(WHO)나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등이 ‘한국은 메르스에 과도하게 반응할 필요 없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전달했음에도 청와대가 한미 정상회담을 연기한 것은 의도가 있는 것이라는 말도 나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노골적으로 “가장 중요한 동맹국과의 회담을 연기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논평했다. 박 대통령의 모처럼 어려운 결정에 대한 이런 식의 의심과 폄훼는 억울해도 결국 우리 외교가 떠안고 해소해야 할 부담이다.
모든 외교행위에는 행동과 의도가 섞여 있다. 행동과 의도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외교관이 하는 발언의 행간을 살펴야 한다는 것도 같은 얘기다. 손자병법은 “겸손한 말로 더욱 준비하는 자는 공격하려는 것이고(辭卑而益備者進也), 강경한 말로 더욱 공격하는 자는 퇴각하려는 것이며(辭强而進驅者退也), 아무런 약속 없이 강화하자는 자는 속이려는 것이다(無約而請和者謀也)”고 했다. 동서고금의 외교ㆍ전쟁사는 행동과 의도의 함수관계의 결과물이다. 우리 외교의 행동과 의도가 어울리지 못한 대표적 실패작이 대북정책이다. 겉으로는 교류하자, 대화하자 하면서 뒤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무너뜨리겠다는 압박을 투박하게 드러내니 남북관계가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하다. 미국과 중국이 으르렁대는 남중국해 사태도 마찬가지다. ‘정당한 주권행사일 뿐’이라는 중국의 주장에 미국이 패권의 의도를 의심하는 때문이다.
한미 정상회담 연기는 당장은 외교적 손실이지만, 대미외교의 흔들림 없는 전략적 사고가 있다면 전화위복으로 삼을 수 있다. 한미관계에 대한 명확한 좌표를 설정하는 게 출발점이다.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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