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소리는 아득하다. 햇살이 따갑게 부서지는 산모롱이 길을 누군가 몽롱하게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어린 시절 콩기름으로 바닥을 문지른 송판마루 교실에서 풍금소리 들린다. 얼굴에 버즘 꽃 하얗게 핀 아이들이 ‘뻐꾹 뻐꾹 봄이 가네...’ 노래를 따라 부른다. 청소를 마치고 텅 빈 운동장을 빠져 나와 산길로 접어들면 찔레꽃이 하얗게 피어 뻐꾸기 소리를 듣는다. 개미처럼 까만 산골아이들은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시골에서 태어난 나는 그 때는 누구나 겪어왔던 가난과 결핍에 대한 지겨움 보다는 단순하고 규칙에 조금은 자유로웠던 어린 시절의 생활이 향수의 아우라처럼 가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도시 생활의 성공이나 실패에서 오는 원인이 아니라 한 개체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추구나 만족을 고민해볼 때도 전원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치악산 금대계곡 화전민이 살았던 움막에 들어 10년을 살다 얼마 전 마음 속 오지로 생각하던 경북 봉화의 만리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겼다. 주변에 인가가 없던 산 속에서 거의 단독자처럼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살던 생활에서 비록 같은 오지이긴 하지만 한 마을에 속한 주민으로서 편입하게 되었다. 오래 비어 있던 작은 공간을 마련하고 똑같이 가난한 여러 친구들의 정성어린 손길로 거처를 수리했다. 능선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는 열 가구 남짓한 마을에도 새로 편입한 이 정체 모를 떠꺼머리 입주민에 대해 궁금증이 없진 않겠으나 그들은 먼저 찾아와 호기심을 드러내진 않았다.
이장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반장님을 만나면 무어라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마을 주민으로서 적극 협조하며 웃어른들을 공경하고 열심히 살겠노라고 인사를 하며 비타오백 한 곽을 쑥스럽게 마루에 놓기도 했다. ‘거 참 범절이 있는 사람 일세’ 이렇게 칭찬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말 전하지 않을까? 혼자 흐뭇해하며 히죽였다. 그런데 그것은 내 생각이고 그 뒤로 이런저런 일로 이런저런 이들에게 훈계를 듣고 훈수를 받았다. 가령, 뭘 하며 살 것이냐? 뭐하는 사람이냐? 퇴거는 했냐? 농사짓기 어렵다! 쓰레기 태우지 마라! 안 보는 것 같아도 다 너를 보고 있다! 는, 마치 너는 시험대에 올라 있다는 협박?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뒷짐을 쥔 손에 꽃송이를 들고 딴청을 부리는 수줍음이었다는 것을 아는데 까지는 금방이었다. 시루떡 두 말을 쪄서 은박접시에 돌리던 저녁에 비로소 전통있는 이 마을에 온전한 일원이 되었다는 덕담과 인사를 한 가득 받았다.
공터 같던 마당에 이웃에서 솎아준 국화 목단 작약이 자리 잡고 칡넝쿨 우거졌던 텃밭에는 가지 오이 토마토 호박 쪽파 고춧대가 싱싱하다. 농지원부를 만들기 위해 임대한 작은 밭에는 감자를 심어라 들깨를 심어라 알려주는 농사월력 역할을 일일이 해주는 반장님이 있다. 우리집까지 포함해서 네 가구의 일을 맡아 보는 반장님은 우리집 거실창을 열면 내려다 보이는 바로 앞에서 과수원을 하신다. 막걸리 두 병을 들고 처음 인사를 가서 “제가 이 마을에서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물으니 “자네는 그저 사람을 내리보지 말고 치보고 살면 되네!” 나는 도시에서 온 것도 아닌데 그저 귀농이나 귀촌을 하면 자기가 그들의 삶을 꿈꾸며 왔으면서도 막상 그 일을 먼저 그리고 아주 오래 하고 있는 사람들을 은근히 내리보는 희한한 모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유월의 한낮. 어린 시절 그 몽환의 뻐꾸기 소리가 애기 사과를 달고 무럭무럭 달려가는 과수원 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난다. 반장님은 주렁주렁한 사과나무에 은빛 사다리를 걸쳐놓고 어린 사과를 솎아내고 있다. 어린잎을 흔드는 바람 한 점이 그의 주름진 목을 스쳐 지나간다. 한 칸씩 은빛 사다리를 올라가며 묵묵히 여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풍경이 엄숙하고 아름답다. 나는 지금 내려다보이는 이를 올려보며 타인에게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을 수 있는 삶을 생각해본다.
정용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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