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공쿠르상 수상 파스칼 키냐르
시·산문·소설 넘나드는 독특한 글쓰기
“나는 결여된 언어를 성급하게 침묵의 형태로 맞바꾼 아이였다.”
언어의 결여 앞에서 택할 수 있는 선택지 중 침묵보다 더 섣부른 건, 기존의 언어체계에 편입되는 것이다. 언어를 공유한다는 것은 사회 안으로 들어오기 전 가장 먼저 해야 할 약속 중 하나이고, 대부분은 감히 약속을 거부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차린 것 없는’ 언어의 밥상에 만족하고 사는 것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에세이 ‘혀 끝에서 맴도는 이름’에 나온 저 구절 속의 감정이 자책인지 아니면 다행스러움인지(성급하게 부실한 밥상을 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건 키냐르가 어린 시절 지독한 자폐증을 앓았다는 것, 그리고 그가 차린 상 위엔 한 번도 본 적 없는 야생의 언어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키냐르의 소설 ‘신비한 결속’이 출간됐다. ‘작가들의 작가’라 불리는 키냐르의 글은 과연 야생에서 채취한 식물처럼 소화가 안 되기로 유명하다. “줄거리는 아예 없거나 아니면 아주 어렴풋하고 모호”하며 “문장과 문장 사이를 연결하는 의미의 맥락은 아주 성글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단절과 휴지”(장석주 ‘풍경의 탄생’)가 밥 먹듯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마흔 여섯의 여성 클레르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번역가인 클레르는 세계 각지를 누비던 생활을 그만두고 번역가 일도 접은 뒤 고향인 바닷가 마을 라클라르테로 돌아온다. 고향에 대한 기억 중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없다. 끔찍한 사고로 부모를 잃은 클레르는 동생 폴과 함께 큰아버지 집에 더부살이를 하며 못돼 먹은 사촌들로부터 지독하게 괴롭힘을 당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죽 함께 해온 연인 시몽만이 그와 고향을 연결시켜주는 고리다. 그러나 이미 결혼해 아이까지 둔 시몽은 클레르와 만남을 이어갈 수 없고, 결국 시몽을 잃은 클레르는 비로소 삶의 유일한 집착에서 놓여난다.
상기했듯 이 소설에서 줄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시몽을 잃은 클레르가 “이 세계와의 접속”을 점차 끊어가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대부분의 공을 들인다. 새벽이 오기 전에 일어나 바닷가의 험한 바위 사이를 누비는 클레르는 들판에서 오줌을 누고 혀를 내밀어 바닷물을 핥아 먹은 뒤 다시 발길 닿는 대로 쏘다니는 야생의 생활을 한다.
자연과 점차 하나되는 클레르의 모습에서 연상되는 하나의 단어는 ‘결별’이다. 그것은 오래 전 작가가 이 세계의 언어를 받아들이기 전 “성급하게” 선언했던 결별이기도 하고, 멀지 않은 미래에 그가 경험하게 될 세계와의 결별, 즉 죽음이기도 하다(올해 67세인 작가는 10여년 전 심한 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클레르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희미한 부러움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작가에게 죽음이란 종말이 아닌 회귀, 즉 사회적 언어를 접하기 이전 백지 상태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듯하다. 대표작인 ‘은밀한 생’의 한 구절을 보면 사회의 언어에 대한 작가의 증오가 얼마나 뚜렷한지 알 수 있다.
“언어가 나타나면, 엿보는 자가 나타나고, 사회가 나타나고, 가족이 재등장하고, 갈라놓는, 후(後)-성적(性的)인 분리가 재등장하고 질서?도덕?권력?위계?내면화된 법이 몰려든다.”
언어의 사회성이 우리의 은밀한 생을 방해한다고 고자질하는 파스칼 키냐르. 그 극단의 결벽 앞에선 미소 지을 수밖에 없다. 사회, 가족, 질서, 권력에 오염되지 않은 언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언어의 진창에 빠져 사는 우리는 “아닌 건 아니잖아요”라고 또랑또랑하게 주장하는 67세 어린이 앞에서 부끄러움과 체념의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작가 덕에 우리는 그 뒤에 숨어 가끔씩 항의해볼 순 있다. 제발 나의 삶을 엿보지 말라고.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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