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제대로 번역 안 된, 그러나 나름 명성은 자자한 한 시인의 시집을 프랑스에서 구해왔다. 식별 가능한 건 시인의 얼굴과 한 페이지에 두어 개 정도나 눈에 밟히는 단어들뿐이지만, 계속 펼쳐본다.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까닭이겠지만, 전혀 읽을 수 없으니 더 각별해지는 연유이기도 할 것이다. 본문은 수 십 년 전 활자체 그대로 프린트돼 있기에 고색창연한 느낌도 더하다. 왠지 더 깊고 풍부한 세계가 그 검으나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의 행렬 속에 암장돼 있을 것만 같다. 감히 내가 번역에 도전해볼까, 하는 충동이 뒤따른다. 그러면서 동시에 과연 내가 끈질기게 완수해낼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내가 하지 않으면 살아선 영원히 이 시인의 본색을 알 수 없지 않을까, 뭐 이런 얼토당토않은 의구심과 사명감(?)이 속에서 충돌한다. 그러다가 이내 판단 중지. 시는 많이 못 봤지만, 이 시인이 쓴 몇 권의 산문번역본을 열독하고 나서는 이상한 친연성 같은 걸 느꼈었다. 그러다 막상 시인의 시집을 대하니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하던 누군가와 재회해 말을 더듬거리며 서로를 재확인하는, 말보다는 존재 확인만으로도 골수가 부글거리는, 이른바 핏줄 당기는 느낌이다. 부지불식 번역 충동이 사라진다. 다시 책을 펼친다. 기이하나 또렷한, 영혼의 음표 같은 문장들. 행간은 여전한 어둠 속이다. 궁극의 예술은 이렇게 빛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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